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인물: 키루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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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0-05 | 조회수3,244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인물] 키루스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다가 자기 신전에 두었던 주님의 집 기물들을 꺼내오게 하였다. 그런 뒤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유다 제후 ‘세르바차르’에게 넘기게 하였다. 품목은 이러하다. 금 접시 30개, 은 접시 1,000개, 칼 29자루, 금 대접 30개, 은 대접 410개, 그밖에 다른 기물이 1,000여 점이었다(에즈 1,7-10). 어지간히도 많이 가져갔음을 알 수 있다. 그 많은 전리품을 키루스는 이스라엘 측에 돌려주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보통 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키루스는 이스라엘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은인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키루스를 메시아라고 선언했다. 주 야훼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기름 부어 선택한 자’라고 한 것이다(이사 45,1-3). 이방인으로서 이렇게까지 칭송된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키루스는 유다인의 종교를 인정했으며, 어디서든 예배하는 것도 허용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기초공사 경비는 왕실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에즈 6,4).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키루스는 유다인에게만 이런 정책을 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빌론의 신전도 복구해 주었고 바빌로니아의 종교도 인정했다. 키루스는 속구의 종교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자신감과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키루스의 ‘페르시아’는 이렇게 해서 다양한 문화를 지닌 국가로 변신하게 된다. 키루스는 티그리스 강 동쪽의 ‘메디아’ 출신이다. 그는 왕의 외손자였다. 왕은 자신의 ‘심복장군’에게 딸을 시집보냈고 키루스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키루스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왕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의 딸이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엄청나게 많은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꿈에 시달리던 왕은 재사들에게 해몽을 요구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외손자가 태어날 것인데 그가 왕위를 이어받아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왕조가 바뀔 수 있다는 암시였다. 왕은 키루스가 태어나자 죽이게 했다. 하지만 키루스는 살아남고 결국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기원전 550년에 일어난 ‘메디아의 쿠데타’다. 이렇듯 키루스는 시련을 견디어낸 인물이다. 궁중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며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이민족을 배려할 수 있었다. 고대 역사에서 피지배 계급의 종교를 인정한 사람은 키루스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역시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문화권의 종교를 인정할 수 있었다. [2009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키루스 (2) 키루스의 원 이름은 ‘키루스 2세’며 키루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1세는 전설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키루스는 ‘메디아’의 왕으로 출발했다. 메디아는 지금의 이란 북서쪽에 있었던 고대국가로 세력이 크지 못했다. 그런데도 키루스는 남쪽의 ‘바빌로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다.
수도 바빌론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유프란테스 강’을 건너야했다. 푸른 강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이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공사를 시작한다. 아무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강물의 흐름을 바꾸었고 강바닥을 걸어 바빌론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후 메디아의 군대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한다. 키루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다. 차츰 키루스는 서남아시아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를 묶어 새로운 나라로 선언했다. ‘페르시아’의 출현이다. 키루스는 초대 황제가 되었고 포로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이 정책으로 유다인들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성전 재건도 허락받았다. 바빌론 주민들도 토속신인 ‘마르두크’를 숭배하는 것이 묵인되었고 종교적 축제도 인정받았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전 지역은 키루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키루스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죽자 맏아들(캄비세스 2세)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죽었고 둘째 아들은 살해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왕실 ‘경호 책임자’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그가 유명한 ‘다리우스 임금’이다. 다리우스는 정통성을 살리기 위해 키루스의 탈인 ‘아토사’와 혼인했고 강압정치를 통해 초기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런 뒤에는 키루스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 역시 주민들의 종교적 관습을 존중했고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추인하였다. 제도적으로 도와주라는 법령까지 내렸다. 기원전 519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은 내부 문제로 지연된다. 사마리아인이 성전 공사에 참여하려 들자 유다인들이 막았던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 섞여 살았기에 정통 유다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마리아 주민들은 분노했고 노골적으로 공사를 방해했던 것이다. 훗날 다리우스 황제의 손자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보낸 뒤에야 성전 재건은 완성된다(에즈 7,11). 키루스의 페르시아는 한때 이집트와 터키를 정복했고 그리스의 일부를 차지했다. 동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맞대었다.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이란’은 1971년 키루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2009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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