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인물: 헤로데 대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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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0-13 | 조회수3,147 | 추천수2 | |
[성경 속의 인물] 헤로데 대왕 (1) 헤로데는 로마제국이 임명한 유다의 첫 번째 왕이다. 통칭 그에게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후계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는 기원전 73년에 태어나 기원후 4년에 죽었다. 그의 치세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후 4년을 넘지 못한다. 헤로데는 시나이 반도와 사해 중간에 위치한 에돔(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는 에돔을 희랍어로 음역한 것이다. 그의 부친 ‘안티파트로스’는 부유한 아랍인으로 에돔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해 동쪽에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귀족이었다. 헤로데는 일생을 유다인으로 처신했지만 부계와 모계는 이렇듯 아랍혈통인 셈이다. 이 사실은 두고두고 그의 정치적 핸디캡이 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안티파트로스는 로마를 지지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세력다툼이 생기자 카이사르 편에 가담했다. 그의 ‘줄타기’는 성공했고 카이사르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며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의 신분은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헤로데는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다. BC 47년 안티파트로스는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통치권을 맡긴다. 정치 시험무대였다. 헤로데는 기대 이상의 수완을 발휘했고 로마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맺으며 인지도를 넓혀갔다. 그러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BC 44년).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은 내분에 휩싸인다. 안티파테르는 음모에 걸려 희생되었고 헤로데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숨어들어가 재기에 성공한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다 왕’으로 명명하며 군대를 주었던 것이다(BC 37년). 이스라엘의 내분을 수습하라는 주문이었다. 이것이 ‘헤로데 대왕’의 출발이다. 이렇게 되자 36세의 헤로데는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유다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32년 동안 모든 수완을 동원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냈다. 왕이 된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대립했을 때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BC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와 함께 제거되고 만다. 이후 실권은 옥타비아누스가 잡았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다(루카 2,1). 헤로데는 즉시 잘못을 고백하며 처분을 기다린다. 그러나 냉정한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받아준다.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티나를 끌고 갈 인물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로데는 다시 한 번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2010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헤로데 대왕 (2) 로마는 헤로데를 왕으로 임명했지만 유다인들은 ‘하스모니아’ 왕가에서 임금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스모니아 왕가는 ‘마카베오 형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오랜 투쟁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유다의 독립을 실현한 자들이다. 이후 백성들은 그들을 ‘대제사장과 사령관’으로 받아들였고 세습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왕조의 출발이다.
민심을 알고 있던 헤로데는 아내 ‘도리스’(Doris)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아 출신의 ‘미르얌’(Miriam)과 재혼한다. 그녀는 대제사장을 지낸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였으며 ‘시몬 마카베오’의 직계였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여전히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헤로데를 에돔 출신의 벼락 출세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견제를 위해 가나안에 속한 이집트 땅을 유다에 일임한다. 헤로데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팔레스티나의 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헤로데는 수많은 요새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해 인근에 세운 ‘마사다’ 요새와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카이사리아 항구’다. 특히 카이사리아(Caesarea)는 페니키아의 옛 도시였는데 12년을 걸려 리모델링했다. 도시 이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견인이었던 ‘카이사르’에서 따온 것이었다. 헤로데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최초의 수중공법을 사용했다. 카이사리아의 방파제는 500미터가 넘었고 사용된 바위 가운데는 20톤이 넘는 것도 있었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물위에 틀을 띄워놓고 그 안에 콘크리트를 채워 가라앉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이다. 동시대의 우리나라는 해모수의 아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통치를 시작하던 때였다. 이후 자신감이 넘친 헤로데는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을 구상한다. 하지만 헤로데는 나이 들수록 어둡고 잔인해졌다. 측근들을 의심해 제거했고 아내 미르얌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마저 살해했다. 나중에는 왕위를 물려주려던 맏아들도 로마의 승낙을 얻어 사형에 처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베들레헴 어린이들의 살해 역시 그의 이러한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유언을 통해 유다왕국을 세 명의 아들에게 분배한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아르켈라오스’에게 주었고(마태 2,22) 왕의 칭호 역시 그가 받았다. 헤로데는 동맥경화에 시달리다 70세에 죽었다(기원후 4년). 로마는 유다의 지배를 위해서는 ‘헤로데 왕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후계자를 인정했다. 하지만 아르켈라오스는 2년 뒤에 퇴위 당하고 유다는 로마의 직할령이 된다. 총독이 다스리는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헤로데의 말뜻은 ‘영웅의 아들’이란 의미다. [2010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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