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한 걸음 한 걸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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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1-28 | 조회수2,990 | 추천수1 | |
[성경과 도덕 해설] 한 걸음 한 걸음 꼬박꼬박 잘 졸다 보니 점점 커피가 늘었습니다. 나중에는 ‘약효’도 없어지고 커피를 마셔도 똑같이 졸았지만, 그래도 졸지 않으려고 무엇인가 했다는 양심의 위안을 얻으려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꼭 커피를 마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마 작년 초에, 스스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고 느끼면서 혹시 커피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커피를 끊어야지! 그러나 끊기로 결심하면 얼마 못 가서 그 결심이 깨지고 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 방법이, 하루에 한 잔만 마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거의 2년 동안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침에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오후에 더 졸릴 때를 위해서 그 한 번의 기회를 아껴둡니다. 적게 마시니까 약효도 살아나서, 이제는 필요한 때 한 번 마시면 제법 효과를 봅니다. 제가 커피를 끊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끊기로 결심했었더라면 이만큼도 성공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이나 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에 최고도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한 걸음 나아가기를 요구합니다. 그만큼 현실적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규범이 변화를 겪습니다. 규범이 요구했던 수준에 근접하고 나면 거기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도덕규범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수렴과 대립에 이어 도덕적 성찰을 위한 세 번째 기준인 ‘진보’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보 : 양심의 정화 과정 이론의 여지가 없는 규범들도 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 이런 규범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규범들은 점차로 변화됩니다. 구약성경 자체 안에서도 변화가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따라 또는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이끌어주시며 새로운 상황 안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아갈 것인지 깨닫도록 제자들을 비추어주십니다(요한 14,25-26). 이러한 과정이 존재하는 것은, 계시 전반이 그렇듯이 성경의 도덕 역시 점진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거치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점차로 알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단번에 커피를 끊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시기로 결심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사람들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이러한 예를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참행복 선언에 이어 나오는 여섯 개의 반대명제들입니다(마태 5,21-48). “…라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런 예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요. 「성경과 도덕」에서도 세 가지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만을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러한 원리는 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에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의 주요한 법전 세 개에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는 이전의 규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도덕을 가르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여섯 개의 반대명제를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규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으십니다.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려면 “눈은 눈으로”라는 법률 조항이 왜 있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법전들에만 나오는 원리가 아닙니다. 함무라비 법전처럼 훨씬 오래된 법전들에서도 자주 나타나던 규정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조항을 정한 것은 “눈은 눈으로”를 넘어서는 지나친 복수를 금지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본다면 “눈은 눈으로”는 잔인한 규정이 아니었습니다.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이 보면 하루에 한 잔 마신다는 것이 많이 마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러 잔 마시다가 한 잔만 마시기로 했을 때에는 그것이 커피를 끊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이미 극복된 것으로 보이는 과거의 율법 조항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진보’들은 대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는 오늘 각 개인의 삶 안에서도 반복됩니다. 복음의 철저한 요구들을 살 수 있게 되기까지, 한 사람의 양심은 점차로 교육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 차원 : 사랑 그리스도교 도덕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외떨어져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부터 ‘공동체 차원’이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적 성찰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신앙은 어떤 공동체를 형성시킵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이러한 공동체들은 교회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삶은 그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부터가 삼위일체이시고 그 삼위일체는 사랑으로 결합되어 계십니다. 인간 공동체는 그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자주 말합니다. 자세히 열거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나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흠 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복음은 분명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어떤 사람을 볼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느끼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각자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저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관계된 모든 도덕적 선택에서는 많은 가치들이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그리스도교적 시각에 따라 다른 모든 가치들을 수반하고 그것들을 결정짓는 것은 타인의 선익을 위해 자신을 초월하는 투신인 사랑이다”(135항). 이러한 차원은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충돌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내가 커지려고만 하는 지나친 이기주의, 실용적인 가치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인간을 도구화하여 노인과 장애인 등을 관심 밖에 두는 것,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것 등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성경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 공동체의 외곽에 있어 소외될 위험에 처해있는 이들을 끌어안는 공동체,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도 열려있는 공동체가 하느님께서 뜻하신 공동체이며 이런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이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이 아닙니다. 완성의 그날까지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 안소근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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