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목적지를 향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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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2-15 | 조회수2,395 | 추천수1 | |
[성경과 도덕 해설] 목적지를 향하여 아끼고 아꼈던 주제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은 단락인데, 글 제목이 「성경과 도덕」 ‘해설’이라서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래도 다른 때보다 좀 더 자유롭게 쓰는 것을, 마지막이니까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궁극성 : 완성을 향하여 ‘궁극성’이라고 해야 할지 ‘목적성’이라고 해야 할지 오락가락했습니다. 문헌을 번역하신 분이 ‘궁극성’이라고 해놓았던 것을 제가 처음에는 ‘목적성’이라고 모두 고쳤다가 다시 문맥에 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궁극성’이라고 고치기는 했는데, 우리말에서 사용하는 단어도 아니고 알아듣기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뜻을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상과 역사의 끝을 알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갈 것인지를 알아야 어느 버스를 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냥 모양이 마음에 드는 버스, 아니면 무조건 사람이 적고 편안한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이 세상은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안다면 삶의 선택들은 그 목적에 의하여 규정됩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삶의 모든 부분들 역시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초기에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점점 더 멀리 확장되어 갑니다. 의인이 꼭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은 한때 구약의 현인들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이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는 믿음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 싹트게 됩니다. 구약에서 ‘희망’이었던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당신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찾게 되리라고(마르 8,34-35 참조), 당신을 믿는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다른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지금 우리의 삶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렇게 당신의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삶이었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삶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또한 순교자들에게서 우리는 실제로 그 가르침을 실천했던 이들의 증거를 봅니다. 특별히 요한 묵시록에서는 이러한 전망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성경과 도덕」 제1부의 끝부분에서도 “5. 도덕적 행위를 고취하는 지평인 종말론적 목표”라는 단락이 있었는데, 이번 달의 내용과 여러 가지로 중복되기 때문에 그때에는 다루지 않고 지나갔었습니다. 지금 그 부분으로 돌아가 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에 대해 말합니다. 묵시록, 한마디로 말하면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완성되었을 때의 교회의 모습을 그려 보이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교회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첫 단계에서 교회는 어린양의 “약혼녀”라고 일컬어지고, 완성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린양의 “신부”라고 불립니다. 아직 교회는 완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특히 요한 묵시록이 우리가 완성될 때를 벌써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또한 우리가 갈 길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목적지는 어린양의 나라,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나라입니다. 주님의 현존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따로 성전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향해 가는 인간의 역사에서는, 어린양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가 서로 맞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잠깐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끝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금년에 농담처럼 여러 번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지한 이야기입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이 너무 타락해서 이제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노아가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8명만 노아의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보면, 세상이 너무 악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멸망하고 말리라고 말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쉽게 믿을 것 같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처음에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신 세상은 선하게 완성될 것이라고,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고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하면,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배에 타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 배에 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그 8명에 끼어야 합니다. 세상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부합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는다면 두 손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적어도 요한 묵시록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제”(묵시 20,6)로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드러나게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가치들을 역사 안에 심으면서 그리스도를 낳는 용기를”(144항, 묵시 12,1-6 참조)가져야 한다고 일깨웁니다. 첫머리에서, 어디를 갈 것인지를 알아야 어느 버스를 탈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고 했었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목적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압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지금의 모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예수님의 선포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하늘나라를 선택하시는 분,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이 “알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도덕적 선택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요약할 수 없이 농축되어 있는 「성경과 도덕」 148항을 인용합니다.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현재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용납할 수 없는 억압의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투신을 가로막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이러한 비난은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는 이것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것은, 구세주께서 목숨을 바쳐 이룩하고자 하셨던 그 질서에 점점 더 근접해 가는 질서를 위하여 투신하고 그 질서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매일 수고를 계속할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미래를 선취하셨고 준비하시기 때문에, 일시적인 모든 가치를 종속시키고 증거를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식별 :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기준은 ‘식별’입니다. 성경의 규범들 가운데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변할 수 없는 원칙과 변경될 수 있는 부분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들어있다고 해서 모든 규범들을 똑같이 절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적 맥락, 각 규범의 신학적 기초, 그리고 문화적 배경 등을 고려하여 그 규범이 오늘 우리를 위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이제 끝을 맺어야겠습니다. 성경의 여러 부분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각도에서 인간 행동의 판단 근거들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 핵심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성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엮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5,1).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안소근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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