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15: 스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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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3-18 | 조회수3,928 | 추천수1 | |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5) 스켐 스켐은 오늘날 많은 성지 순례자들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스켐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 위치와 지형 사마리아 지방의 스켐은 예루살렘에서 나자렛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다. 남쪽의 해발 880m 그리짐 산(Mount Gerazim)과 북쪽의 해발 940m 에발 산(Mount Ebal) 사이의 평지에 자리한 스켐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65km 떨어져 있다. 스켐은 ‘목덜미’라는 뜻으로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하다는 의미이다. 스켐 주변의 이 두 산은 신명 11,29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려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시면, 그리짐 산 위에서는 축복을, 에발 산 위에서는 저주를 선언해야 한다.” 일찍이 스켐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고 팔레스티나를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지, 전략적 요충지였다. 정치적인 결정에 의해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었지만 스켐은 “팔레스티나의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리며 산악 지대의 자연적인 수도로 여겨진다. ■ 구약성경의 스켐 스켐은 가나안의 주요 도시들 중의 하나였는데, 하란에서 온 아브라함은 여기에 제단을 쌓았다.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창세 12,6-7) 창세 33,18-20에서 야곱은 스켐에서 땅을 사고 제단을 세웠다.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세 34,1-31에 따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스켐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는데, 그녀의 오빠인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인들에게 복수를 하였다. 스켐은 여호수아 시대에 에프라엠 지파와 마나쎄 지파 사이의 경계가 되었다. “므나쎄의 경계는 아세르에서 출발하여 스켐 맞은 쪽에 있는 미크므탓에 다다라, 다시 남쪽으로 엔 타푸아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간다.”(여호 17,7) 그리고 요셉의 뼈는 이집트에서 스켐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올라온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야곱이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돈 백 닢을 주고 산 밭에 묻었다. 그곳은 요셉 자손들의 상속 재산이 된 곳이다.”(여호 24,32) 판관 9,1-6에는 여루빠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켐을 통치하게 된다. 한편 1열왕 12,1에서 온 이스라엘이 스켐에 모여 르하브암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르하브암과 북쪽 지파들의 갈등으로 기원전 928년의 내전 이후 예로보암은 스켐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1열왕 12,25) 기원전 722년에 북 왕국이 함락된 이후 아시리아인들은 이방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혼합족인 사마리아인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그리짐 산 정상에 제단을 쌓았다. 사마리아인들의 지도자인 산발랏(Sanballat)은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였다.(느헤 4,1-9) ■ 신약성경의 스켐 요한 4장에는 유다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5-6절) 이 장면의 배경은 분명히 스켐이다. 구약성경에는 언급이 없고 요한 4,6에 소개되는 야곱의 우물은 오늘날 텔 발라타(Tel Balata)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에서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에 복음을 선포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 뒤를 따랐다.(사도 8,4-25) ■ 고고학과 역사 스켐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1913년에 시작되었고, 1926-28년과 1932-34년에, 그리고 1956-57년과 1962-68년에 계속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은 스켐에서 기원전 4천년기 점령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인상적인 폐허는 힉소스 (Hyksos) 시대의 것이다. 넓은 성전과 큰 도시의 성문들이 힉소스인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기원전 1550년경에 이집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집트 점령 이후 도시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예로보암 1세가 재건을 계획했던 시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폐허들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스켐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다. 하스모네아 가문의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는 기원전 128년에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하였는데, 이 때 불태워진 성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그 후 스켐은 하찮은 마을이 되었다. 스켐의 북쪽 언덕 위에 세바스티아(Sebastia)를 건설한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은 그곳에서 마리암(Mariamme)과 결혼하였으며 이 도시를 명승지로 만들었다. 헤로데의 도시인 세바스티아에는 부분적으로만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도시로 들어가는 기둥들로 이루어진 긴 입구가 인상적인 발굴이다. 기원후 72년에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의 명령으로 에발 산과 그리짐 산 사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이 도시를 새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네아폴리스(Neapolis)라고 불렀다. 이 이름에서 오늘날 존재하는 도시인 나블루스(Nablus)의 명칭이 유래하였다. 야곱의 우물에 있는 기념 성당은 오랜 역사를 가진다. 비잔틴 시대에는 이 지역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다. 기원후 380년에 십자가 모양의 성당이 세워졌다. 이 성당의 여러 지하 경당들 중에는 세례대도 발견되었다. 이 성당은 484년 혹은 529년 사마리아인들의 반란 때 파괴되었다. 그 후 성당은 재건되어 9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초기 아랍 시대에 파괴된 성당을 십자군 시대에 다시 세웠다. 1860년에 그리스 정교회는 이 지역을 매입하였고 야곱의 우물이 있는 지하 경당을 1893년에 복원하였다. 십자군 시대의 건물 위치와 규모를 따르는 기념 성당의 재건축은 1914년에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3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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