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서8: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예수님(마르 8,27-33)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용어] 영어로 ‘mediator’로 번역되는 용어의 번역 용어인 ‘중보’(中保)는, ...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3-30 | 조회수4,175 | 추천수1 | |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8) 이번 호에서는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중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마르 8,27-33)
마르코 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자렛 예수님, 그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는 복음서 초반에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복음서 초반에는 예수님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이 소개됩니다. 1장 27절에서는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악령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서 수군거립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2장 7절에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한다고 권위 있게 선언하는 예수님을 보고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4장 41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렇듯 복음서 초반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확고한 신앙 고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에게 경탄이 쏟아지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해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결정적 대답은 바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고백에서 나타납니다.(마르 8,27-30 참조) 이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길을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던 토론을 마감시키시려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십니다. 군중의 분분한 여론은 예수님의 정체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못했다는 당시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알리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 한층 다가섰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초대교회 신앙 고백문의 단순한 형태입니다. 마르코는 이러한 초대 교회의 고백을 복음서 안에 반영시켰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은 복음서 첫머리부터 마르코가 줄곧 염두에 두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따라 복음서를 읽어오다가 베드로의 고백 장면에 이르러서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함께 하게끔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 사화뿐만 아니라 수난과 부활 사건까지 실현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 곧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왕을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가 소개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바라는 해방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사용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이사야가 묘사해 주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마르코는 해방자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의 잘못된 메시아 상(像)을 바로잡아 주려고 합니다. 한편 초대 교회에도 박해의 위험에 처해서 신앙을 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는 영광의 그리스도도 십자가의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생겨날 수 없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붙들고 펄쩍 뛰는 베드로의 모습은 고난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갈등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로 고백해야 하며, 따라서 수난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얻게 된 메시아를 본받아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르코 복음」, 2010, 기쁜소식, 121-136쪽. [길잡이, 2013년 4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