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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여행10: 마르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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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6 조회수3,270 추천수1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0) 마르코 (하)

광야 · 빈 무덤 지나 부활의 갈릴래아로


빈 무덤을 찾은 세 여인이 예수가 부활했음을 알고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이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부활을 선포하고, 예수가 기다리는 갈릴래아로 가게 된다. 그림은 코르넬리우스(1783~1867)의 '무덤가의 세 마리아'.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한다. 하늘이 갈라질 정도로(마르 1,10) 강력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내던졌다'(1,12).

마르코복음은 광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수가 사탄을 제압하고 들짐승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3). 이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9)하고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했다는 표지다.

마르코복음에서 광야라는 장소는 대단히 중요하다. 광야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서 복낙원(復樂園)을 암시한다. 예수가 수천 명의 군중을 먹일 때 광야는 초원으로 변모한다(6,39-40). 이는 이사야서를 비롯한 묵시문학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예수 도래와 함께 나타난 성령의 활동 안에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하고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왔지만 여전히 감춰져 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믿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 하느님 나라와 믿음이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하느님 나라 선포는 공동체가 더불어 수행해야 하는 공동의 소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는 자세다. 예수의 네 제자가 생업과 가족을 포기하고 뒤따랐던 것처럼, 구체적 삶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1,18).

예수가 행한 치유와 구마(驅魔) 행위는 기존 질서와 충돌하는 부분이 많았다. 마귀는 성경에서 인간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둠의 세력인 동시에 공동체의 사회적 시스템, 또는 자연 배후에서 작용하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구마 행위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구조적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5장에 기록된 '마귀들과 돼지 떼' 에피소드다. 예수가 마귀 들린 이 앞에 나타나 이름을 묻자 그 안의 더러운 영들이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했다(5,9). 이들은 예수에게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더러운 영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더니 호수에 빠져 죽는다(5,10??13). 마귀들의 이름을 군대라고 밝힌 것은 로마 군대를 연상시킨다. 이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로마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서 현재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현실이 변모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제국주의적 현실과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꼽음으로써(12,29), 인간의 궁극적 원리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는 성전 앞의 환전상과 비둘기장수를 쫓아내는 성전 정화사건(11,15)을 벌인다. 그리고 성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파괴되리라고 암시한다(13,2). 또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행위를 금지시킴으로써 제구를 나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는 유혈제사를 비판하고,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11,17). 유혈제사를 대신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빵으로 바꾸어 나누는 성찬례가 그리스도교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마르코복음은 후반부에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16,8)고 진술한다. 빈 무덤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이를 선포하기보다는 두려워서 스스로 입에 족쇄를 채우고 도망친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1장의 배경인 '광야'에 다시 놓인 것과 같다. 이처럼 마르코복음서는 광야에서 시작해 무덤으로 끝난다. 그러나 광야가 주님이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잠시 준비하는 곳인 것처럼, 무덤 역시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확인하는 장소로서 거쳐 가는 장소일 뿐이다. 때문에 제자들은 당혹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으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고, 예수가 기다리는 갈릴래아(16,7)로 향해야 한다.

이는 인간적 좌절과 실패, 두려움을 겪는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초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7일, 정리=김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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