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성경풀이: 베타니아와 라자로의 소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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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5-14 | 조회수3,173 | 추천수1 | |
[성경풀이 FREE] 베타니아와 라자로의 소생 - 라자로 무덤 입구.
성서 시대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 산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가난의 동네”라는 뜻의 베타니아에 나병 환자 시몬이 살았고(마르 14,3), 라자로도 앓다가 죽었음을 생각해 보면 가난한 병자들이 많은 빈민촌이었던 듯하다.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붓자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게 낫다던 제자들의 반응이 베타니아에서만 언급되었기 때문에(마태 26,6-13; 마르 14,3-9), 주위에 빈민들이 많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특히 베타니아에서 앓다가 죽었던 라자로는 히브리어로 ?????(엘아자르)였고,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듯하다. 예수님이 라자로 남매의 집에 자주 머무셨을 뿐 아니라, 라자로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라 표현했기 때문이다(요한 11,3). 그래서 그의 죽음을 접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에는 이들 남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스며있었던 듯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의 감정까지 이입되는 것처럼, 오빠의 죽음을 아파하는 누이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이된 듯한. 그러다가 예수님이 죽었던 라자로를 불러내셨을 때,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기록한 일곱 개의 표징 중 하나가 되었다. 젊은 날에 요절하여 여운이 남았을 라자로. 그래서 두 번째 삶을 선사 받았을 때에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생명의 희열을 느꼈을 것 같다. 가끔 베타니아 라자로의 무덤을 찾아가 칠흑 같은 어둠 안에서 생명과 죽음을 묵상해 본다. 그때마다 안식 같은 위로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헤어날 수 없는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라자로를 덮었던 죽음이 내게도 다가오는 것 같은, 무덤 속에 홀로 누워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것이 바로 죽음이구나 하는 묵상과 더불어, 죽음 안에서는 누구나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죽음에 대한 절망이 너무 진해서 짧은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행복이 상대적인 것처럼 죽음을 대하는 마음 또한 지극히 상대적이다. 고달픈 인생의 피로를 접고 안식으로 들어가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현재의 재물과 명예를 포기하지 못해 발버둥치는 죽음도 있다. 그리고 라자로처럼 요절하는 죽음도 있다. 그 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만, 신앙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한다.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공포를 잊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닥치게 될 손님 같은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 운명에 순종하는 성숙함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살더라도 죽겠고 죽더라도 살 것이라는 말씀(요한 11,25-26)이 깊이 다가오는 라자로의 무덤 속에서, 삶과 죽음과 부활에 맡겨진 나 자신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나의 운명이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라도, 라자로가 경험했던 죽음과 소생, 그리고 두 번째 죽음과 영원한 부활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 안에서 평화로운 거라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건네고 싶다. [2013년 1월 20일 연중 제2주일 인천주보, 김명숙 소피아(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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