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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성경과 신들15: 기적의 강, 심판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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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8 조회수3,066 추천수1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5) 기적의 강, 심판의 강

'강의 심판의 날'에서 유래한 '환난의 날'


고대 근동인들은 강을 온몸과 마음으로, 영혼으로 느끼며 마치 신을 대하듯 강에 대한 두려운 마음, 곧 경외심을 지니고 살았다.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은 수메르 시대 이전부터 이미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는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이 중 두 강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다(창세 2,11-14 참조). 창세기에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신화적 의미, 곧 태초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의 강'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을 신으로 언급하지 않고 지명으로만 사용했다. 구약성경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훨씬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유프라테스는 지리적 경계의 의미로 사용돼 주로 이집트의 북쪽 경계를 의미했다.

요르단 강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강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도 요르단 강이 신으로 나오는 적은 없다. 요르단 강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 목적지인 약속된 땅의 경계였다.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나아만의 치유에서 보이듯 구약성경에서 요르단 강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기적의 장소로서 요르단 강의 의미는 신약성경으로 이어진다. 요르단 강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장소다. 예수님의 세례는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요르단 강은 하느님께 향하는 상승 운동과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하강 운동이 교차하는 곳이자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기적의 장소로, 신은 아니지만 의미가 큰 강이다.

한편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에는 강에게 정의를 물어보는 절차가 있었다. 흐르는 강물이 정의를 밝혀낸다고 믿은 것이다. 고 바빌론인들은 겸허히 강의 신에게 정의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은 지나칠 만큼 단순했다. 강 한복판에 피고인을 풍덩 빠뜨렸다. 물에 빠진 자가 죄인이라면 강의 신이 그를 처벌해 익사하게 된다.

만일 그에게 죄가 없다면 정의의 신인 강의 신이 그를 자유롭게 풀어줄 것이다. 강가에서 산 채로 발견되면 그는 자유다. 그러면 그를 고소한 이는 무고죄에 걸린다. 죄 없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중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어느 쪽이든 신을 모독한 사람은 목숨과 집(재산)을 모두 내놓아야 한다. 이 같은 규범이 고대인의 원시적이고 미개한 악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정의는 인류 종교사에서 오랜 전승을 지닌 관행과 같다. 종교학에서는 이렇게 특정한 징표를 사용해 신의 뜻을 물어 죄의 유무를 가리는 고대의 재판을 '신성 재판'이라 한다. 신성 재판의 방법에는 강이나 바다에 빠뜨리거나 불 위를 걸어가게 하고, 독약을 소량 섭취하게 하는 방식이 있었다. 이런 위험을 이겨내 살아난 사람은 죄가 없다는 보증을 받은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이처럼 '정의를 판결하는 강'이 있다. 신성 재판에 사용되는 강을 수메르어로 '이드'라고 불렀고, 아카드어로는 '이두'라고 했다. 이 낱말은 히브리어 '에드'로 계승된다. 에드는 '최종적이고 분명한 심판'이라는 의미다. 이 의미에서 보듯 구약성경에서 '강의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의 의미는 그대로 남았다. 히브리 성경을 적은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이 낱말에서 강의 신을 연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신적 심판'이라는 뜻은 그대로 사용했다. 이런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표현이 바로 '에드의 날'이다.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강의 심판의 날'이란 뜻인데 문맥에 따라 '환난의 날' 또는 '재난의 날' 등으로 옮길 수 있다.

그들의 '에드의 날'(환난의 날, 재난의 날) 나는 그들에게 얼굴 대신 등을 보이리라(예레 18,17 참조).

한편 모세가 유언으로 남긴 노래에서도 비슷한 경고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은 멸망의 날이요 재난의 날이다. 에드의 날(멸망의 날, 재난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신명 32,35).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유효하다. 이 심판의 날은 이민족들에게 '환난의 날'이 될 것이다. 이집트에 내릴 환난의 날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에서는 '에강의 날과 징벌의 때가 그들에게 닥치면 그들도 견뎌 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함께 달아나고 만다'란 구절이 나온다(예레 46,21 참조).

여기서 에드의 날은 '신적 심판' 그 자체보다는 '신적 심판의 날을 연상할 만큼의 큰 환난과 고통의 때'를 의미한다. 에드의 날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됐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모티프를 사용해 자신들의 성찰을 표현했다. 고대 근동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성경의 표현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19일, 정리=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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