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 엘리사벳 -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는 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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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6-03 | 조회수4,003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여인] 엘리사벳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는 여인 루카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소개하며, 아주 짤막하게 그의 삶을 전해주고 있다(루카 1,5-25.39-80 참조). 엘리사벳은 아론의 가문에서 태어난 여인이다. 그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아비야 조에 속해 있던 사제 즈카르야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즈카르야 차례가 되어 성전에서 봉사하는 기간 외에도 하느님을 늘 섬기며 진실한 마음으로 올바른 삶을 살았다.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증언한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6절)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 그런데 이 부부에게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모진 운명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여성으로서 이 모진 운명을 남편 즈카르야보다 더 깊이 느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다.”(7절) 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제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학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사람들은 불임증에 대한 책임을 거의 여성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 혹은 낡은 사상이 오늘날까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가끔 경험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일은 유다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이 결혼의 근본 목적과 본질적인 의미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에 관해 구약성경은 여러 번 우리에게 증언한다.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니를 시샘하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 버리겠어요.’”(창세 30,1) 라헬을 비롯하여 사라와 레베카 등 아이를 낳지 못하던 구약의 많은 여인들처럼, 엘리사벳도 깊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아이를 낳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아뢰었을 것이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겪었던 개인적 고통과 절망을 넘어서서, 주변으로부터 받았을 따가운 시선과 조소로 하루하루의 삶은 그야말로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엘리사벳의 마음속에서 어떤 갈등과 싸움이 벌어졌는지, 그가 새로운 절망과 함께 어떻게 늘 무기력하게 자포자기에 이르렀는지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든 고통과 더불어 그 부부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혼인을 충만하게 완성하는 자녀출산에 대한 희망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치욕에서 벗어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천사가 성전에서 봉사하던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들을 곧 낳을 것이라고 예고했을 때, 즈카르야는 몹시 놀라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의심스러운 나머지 천사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18절) 이렇게 그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던 이유로 하느님에게서 잠시 동안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하느님의 형벌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종종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즈카르야는 말 못하는 그 기회를, 입으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자기 내면의 소리들을 남김없이 듣는 기회로 이용한다. 이때 들었던 그 소리를 그는 나중에 찬미 노래의 형식으로 아름답게 표현한다(루카 1,67-79 참조). 그러면 천사의 소식을 들었던 엘리사벳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안타깝게도 복음사가는 엘리사벳의 직접적인 반응을 전해주지 않는다. 천사의 전갈이 참으로 놀랍고 믿기지 않는 내용이라서 엘리사벳이 나이 든 사라처럼 속으로 웃었는지(창세 18,12 참조) 혹은 큰 기쁨과 더불어 감탄의 눈물을 흘렸는지 우리는 그 여부를 알 길이 없다. 루카는 아주 단조롭게 이렇게 말한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다.”(24절) 오늘날 많은 여성들도 발달한 현대 의학기술과 크게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모진 운명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은 틀림없이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에 대해 엘리사벳이 감사를 드렸던 마음에 분명 공감할 것이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행복에 겨워도 이웃을 잊지 않는 여인 엘리사벳은 참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만 도취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위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은 마리아와의 만남에서 엿볼 수 있다. 엘리사벳의 친척인 마리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이 임신은 정상적인 남녀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위로부터 오해와 의심을 살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임신하여 곤경에 처한 마리아는 자신에게 어머니다운 도움을 베풀 협력자를 찾고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중요한 일들에만 몰두하고 있었지만, 엘리사벳은 곤경에 처한 마리아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엘리사벳은 인생의 깊은 연륜과 많은 체험을 바탕으로 마리아의 마음을 다독여 진정시키고 고요와 평온을 되찾아 준다. 이렇게 엘리사벳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마리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 외에도,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계획과 업적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도 더 위대한 일에 선택된 마리아의 소명을 어떠한 시기심과 질투심 없이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잉태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해 기뻐할 수 있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은 모든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2-44절) 이처럼 관대하고 넓은 마음과 사랑에 뛰어난 감성을 지닌 여성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아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함께 크게 기뻐하였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58절)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히브리어로 자비(rachamim)와 어머니의 자궁(rechem)은 같은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뱃속에 든 자기 아기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 곧 하느님의 아버지다운 사랑과 어머니다운 사랑을 늘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쌍백합, 제19호, 2007년 겨울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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