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 허리가 굽은 여인 - 절망 속 포기치 않는 믿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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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6-03 | 조회수3,159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여인] 허리가 굽은 여인 절망 속 포기치 않는 믿음, 치유와 구원의 은총으로 때는 바야흐로 안식일이었다. 열성적인 유다인에게는 모든 노동이 엄격하게 금지된 날이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때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눈에 띄었다(루카13,10-12 참조).
질병과 고통으로 점철된 여인 성경은 그녀가 십팔 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허리가 굽어서 몸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처지였다. 한번이라도 직접 디스크를 앓아본 사람이라면, 며칠 동안만이라도 신경계통의 질환 때문에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성경의 여인이 겪고 있는 질병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를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주 참기 어려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고통 때문에, 그리고 등이 굽어 있는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자기 자신을 자신감 있게 마음껏 드러낼 수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허리가 굽어 있던 관계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항상 시선을 하늘에 두지 못하고 땅바닥에 두고 살아야 했다. 이것은 환자들이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고압적인 명령을 받으면서 살고 있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십팔 년 동안이나 살았다. 루카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이 여인은 그 혹독한 질병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것이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그 잃어버린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이상적 삶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본래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곧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찬 사랑의 삶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 삶을 동경하고 지향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꿈은 혹독한 질병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아주 기쁘게 밝은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무척 위축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주 쉽게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졌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원망했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처지가 된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원망하지 않겠는가? 그 누군가가 이 여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굽어보시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하더라도, 이것은 그녀에게 지나치는 말투로 들리고 씁쓸한 여운만을 남길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중병에 걸린 여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병에 걸린 그녀는 큰 고통 속에서 슬픔과 절망을 느끼며 삶이 원망스러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회당에 갔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가 깊은 절망 속에서도 유일하게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었다. 중병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이제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회당에서 그녀는 결정적인 만남을 실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누리게 된다. 여인을 똑바로 일으키시는 예수님 회당 안에서 갑자기 그녀는 고압적인 자세로 자기 자신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줄곧 고요하고 자비로운 눈길로 자기 자신을 주시하시는 분을 만난다. 그분의 따뜻한 시선은 점점 그녀를 사로잡는다. 왜냐하면 그분의 시선은 단지 동정심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시선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녀 존재 전체를 인정하시고 남김없이 받아들이시는 눈길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곤경에 빠진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에게 줄곧 보이셨던 따뜻하고 사랑스런 시선으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그 여인을 부르신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에 그 여인은 예수님께 회당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중요하고,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시선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갔던 세리 자캐오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그를 부르셨고,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병자들과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항상 가까이 다가가셨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12절) 이런 치유말씀에 이어 인간적인 온정과 친밀함을 의미하는 예수님의 행동이 뒤따른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은 말씀과 안수는 환자에게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 곧 환자의 상처 전체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갑자기 허리를 펴고 똑바로 일어서서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한다(13절). 여성과 남성을 위한 기쁜 소식 이 치유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용기를 잃고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분께서는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지 참으로 자유롭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 앞에서 그리고 그분 앞에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곧 고개를 떨어뜨리고 시선을 땅바닥에 두는 식의 삶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시선을 늘 그분께 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깊은 절망과 큰 불행이 우리에게 들이닥쳐 우리 존재 전체를 짓누를 경우 오직 그분께서만 우리의 몸을 똑바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총은 한계가 없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는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나아가 시대의 벽을 넘어선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여인을 온전하게 치유하시자마자, 그곳에 있던 회당장은 즉시 예수님께 분개하며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질서와 계명을 수호하고 있다고 자처하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신다. 곧 사랑의 계명은 다른 모든 제의적 규정이나 율법보다 더 우선된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신다.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16절)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여인을 아주 이례적으로 ‘아브라함의 딸’로 부르셨던 것은 그분의 자비로운 눈빛과 행동에 의해 여성의 특유한 어려운 처지를 고려하셨기 때문이다. 유다인에게는 오직 남자들만이 약속의 상속자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지칭되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면서 그 여인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며,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신다. 여성들은 아브라함의 딸들로서 뭇 남성들처럼 구원으로 초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도움으로 똑바로 일어선 여인은 회당에서 남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을 찬양함으로써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쌍백합, 제22호, 2008년 가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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