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 드보라 - 강한 믿음과 용기 앞세워 예언 · 판관직무 훌륭하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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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6-03 | 조회수3,367 | 추천수2 | |
[성경 속의 여인] 드보라 강한 믿음과 용기 앞세워 예언 · 판관직무 훌륭하게 구약성경의 판관기는 이스라엘의 초창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곧 이스라엘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이르러, 그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판관기는 역사적인 실제 사건들을 액면 그대로 전해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일정한 역사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곧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계획’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판관기의 한 중심에는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왕들은 판관들처럼 이스라엘의 백성이 외세에 의해 공격을 받고 식민통치를 당하던 어려운 상황에서 해방자와 구원자로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판관기가 제시하고 있는 각 판관들의 이야기는 ‘죄(배신) → 징계 → 회개 → 구원’이라는 도식적인 구조를 순환적으로 반복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야훼 하느님께 대한 배신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잊고 바알 종교에 빠지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판관 2,11).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신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잊고 살아온 시간들을 참회하고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에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판관 2,16). 여예언자이며 여판관인 드보라 판관기는 열두 판관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드보라는 예언직과 판관의 직무를 수행한 유일한 여자였다. “그때에는 라피돗의 아내 여예언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판관이었다. 그가 에프라임 산악 지방의 라마와 베텔 사이에 있는 ‘드보라 야자나무’ 밑에 앉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재판을 받으러 그에게 올라가곤 하였다”(판관 4,4-5). 드보라는 남자들에 버금가는 용기 있는 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을 집행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군대와 맞서 싸우게 했던 여예언자였다. 한 여성이 정치, 군사, 종교 등의 영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백성을 다스렸던 일은 당시의 사회에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다인 역사가 레빈슨(Pnina Nav Levinson)은 드보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드보라에게는 누구보다도 강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그를 신뢰하고 믿었다. 곧 드보라는 주님의 영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이 그를 믿었다.” 그런데 드보라는 여자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이끄는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바락 장수를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할 책임을 맡기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바락 장수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4,6-7). 그런데 바락 장수는 드보라의 강한 모습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드보라가 가나안의 철로 된 병거를 맞서 싸우라고 요구하자, 바락 장수는 겁에 질린 채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께서 함께 가시면 저도 가겠지만, 함께 가지 않으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4,8). 이런 소심한 응답에 대해 드보라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의식하며 겁에 질려 있는 바락에게 대범하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반드시 그대와 함께 가겠소. 그러나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그대에게 영예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주님께서 시스라를 한 여자의 손에 팔아넘기실 것이오”(판관 4,9).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에 든 낡은 무기로 병거와 기마와 철로 무장한 가나안의 막강한 군대를 쳐 이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앞에 서서 나가시고, 가나안의 장수 시스라와 그 군대들은 이스라엘 사람의 손에 넘겨주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 비록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나약함으로 부패되어 하느님을 버리고 낯선 이방신들을 섬길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또한 당신의 희망을 두셨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이웃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신다. 드보라를 위시한 판관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이름과 명령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철저한 도구였다. 따라서 그들은 죄를 지어 외세에 의해 수탈과 억압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수렁에서 건져냈다. 드보라와 바락이 불렀다는 승전가(판관 5장)는 히브리 성서의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이다. “임금들아, 들어라. 군주들아, 귀를 기울여라. 나 주님께 노래하리라. 내가 노래하리라.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노래 부르리라. … 임금들이 모여 와 싸웠네. 그때에 므기또의 물가 타아낙에서 가나안 임금들이 싸웠네. 그러나 은 노획물은 얻지 못하였네. 하늘에서는 별들도 싸웠네. 자기들의 궤도에서 시스라와 싸웠네. 키손천이 그들을 휩쓸어 가 버렸네. 태고의 개천, 키손천이. - 내 영혼아, 힘차게 나아가라. - 그때에 말발굽들이 땅을 찼네. 치닫고 치닫는 군마들의 발굽이. … 주님, 당신의 원수들은 모두 이렇게 망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 유다인의 여성 시인들과 여성 신학자들은 판관 드보라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특히 여성이 과연 랍비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되면 더욱 그렇다. 랍비는 간혹 사람들을 서로 중재하고, 재판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다인의 관례에 따르면, 증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법을 다룰 수 있었고, 전통적으로 오직 남자들만이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아울러 예배를 거행하는 직무에서도 여성은 제외되었다. 이런 유다교를 이른바 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사람들은 드보라의 모범에 의지하여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레빈슨은 드보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여성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과 인류의 많은 지도자들은 드보라와는 정반대로 자기 자신들을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척도로 여기려는 유혹에 빠졌다. 그러나 판관기는 이와는 다른 기준, 곧 신학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곧 이 세상의 권한은 모두 어떤 절대적 권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여받은 권한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백성을 진심으로 섬겨야지, 반대로 백성들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깊이 해당되는 말이다. 예컨대 기업가, 법률가, 언론가, 학자, 선생, 성직자 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판관 5,7)로 부르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런 개별적 사건들과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하느님께서 서 계신다. 인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만드시려는 하느님의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분만이, 오직 그분만이 지도자, 심판관, 해방자에게 일정한 책임을 맡겨주실 수 있다. 지도자와 심판관과 해방자 등이 거두는 성공은 그들 자신의 의지나 능력, 노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의지와 권능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드보라는 이렇게 노래한다. “임금들아, 들어라. 군주들아, 귀를 기울여라. 나 주님께 노래하리라. 내가 노래하리라.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노래 부르리라”(판관 5,3). 드보라의 이 노래는 권력자나 지도자를 향해 경고하고 있다. 곧 자기 자신들이 하느님에게서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부정하는 모든 권력자들에게,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 일정한 책임을 짊어져야 함을 부정하는 모든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하느님만이 권한과 능력을 주실 수 있다! 지도자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 [쌍백합, 제27호, 2009년 겨울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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