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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의 여인: 일곱 아들의 어머니 -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 바친 사람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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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4 조회수3,154 추천수1
[성경 속의 여인] 일곱 아들의 어머니

신앙을 충실히 지키려고 목숨 바친 많은 사람 대변


마카베오 하권에는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있다. 폭정으로 인한 착취와 약탈, 박해와 죽음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게만 들리지 않는다. 제왕적인 권위, 고문, 억압, 정치적인 살인 등은 우리 지구상에서 자주 접하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초에 있었던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억압과 탄압,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에서 야당이 겪는 정치적인 억압,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아시아의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의 비극과 참상 등을 비롯하여 우리 시대의 비극적인 현실을 우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열거할 수 있다.

마카베오기 하권이 집필되던 기원전 2세기에 많은 유다인들은 임금의 기만과 잔인한 행동에 의해 탄압을 받고 희생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마저 역사 안에서 비슷한 운명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가?


하느님과 계명에 충실한 신앙

먼저 마카베오기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요약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배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빌론 제국은 기원전 6세기경에 그 동안 정치적으로 지배하였던 유다인들을 풀어주었다. 그 결과 유다인의 엘리트들은 바빌론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다인의 옛 왕권은 온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바빌론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가 부흥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 공동체의 행정자치권을 간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후 4세기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렸고, 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에 넘어갔다. 이렇게 팔레스티나는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에 시달리며,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 하에 유다에는 곧바로 헬레니즘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층이 형성되었는데, 주로 지도층 가문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엄격하게 지켜지던 유다인의 종교적 관습인 음식법과 정결례법 등은 점점 완화되어 갔다. 기원전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권을 물려받는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쇄신하기 원했고, 그래서 이집트를 침략했고, 자기 휘하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헬레니즘 문화와 관습과 법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조상 대대로 지켜온 종교와 관습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탄압과 박해를 당하기 시작했는데, 마카베오기는 바로 이를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마카베오기가 보도하는 사건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사건을 선별하여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각색한 내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도되는 사건을 역사적이 실제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마카베오기 하권은 특히 악인을 벌하시고 선인에게 보상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라는 신학적 주제 아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굳건한 신앙을 촉구하고 격려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명과 법을 거스르는 이들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 충실한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의 용기와 확고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신앙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익명으로 다뤄진다. 일곱 형제 - 이 숫자도 상징적이다 - 와 그 어머니는 신앙에 충실하다가 목숨까지 바친 수많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2마카 7장 참조).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임금의 강요에 따르지 않는다. 돼지고기의 제물은 그리스의 주검숭배 예식과 어둔 세력을 공경하는 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에게는 돼지고기를 먹는 일이 모세의 율법으로 금지되었다. 음식에 관한 규정을 준수함으로써 유다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주변의 이방인들에게서 구분지었다. 하지만 헬레니즘에 이미 동화된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느슨하게 대하였다. 이런 태도는 정통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느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되었다.

유다교 내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이런 보수적인 그룹을 길들이려는 임금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일곱 형제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초와 고문을 당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지금 자신들을 바라보고 계시며, 자신들이 그분께 충실한 경우 그분께서도 자신들에게 신의를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 고통을 견디어 냈다. 하느님에 의해 기적적인 구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곱 형제들과 어머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환난에서 진정한 승리자이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죽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면서 하느님의 권능에 온전히 신뢰하라고 당부하였으며, 막내에게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에 임금은 격분하여 아직 소년이었던 막내를 더 지독하게 다루고 살해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어머니도 살해하였다.


순교자 편에 서 계신 하느님

하느님은 무죄한 희생자, 곧 약자의 편에 서 계신다. 이것이 바로 이 순교 이야기의 신학적 요지이다. 일곱 형제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항변하면서 장렬한 순교의 길을 택한다.

첫째, 지금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임금은 목전에 다가온 운명인 하느님의 심판형벌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임금은 하느님을 겨냥하여 무모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온 세상의 임금이시다(2마카 7,9 참조).

둘째, 하느님은 무에서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다(2마카 7,28 참조). 따라서 하느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지금의 슬픔을 기쁨으로,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고 창조하실 수 있다.

셋째, 이런 창조신앙은 형제들에게 부활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일곱 형제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2마카 7,14) 순교를 당한다. 곧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에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부활에 대한 희망, 죽음을 넘어서면서까지 지속되는 하느님 신의에 대한 희망은 당시 유다교에서는 새로운 사상이었지만, 그 박해 시대에 생겨나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예수님의 시대에 부활신앙은 몇몇 유다인의 그룹에 의해, 곧 사두가이파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도 - 하느님의 권능에는 한계가 없음을 받아들였고, 그분의 권능은 세상의 죽음에 넘어선다고 믿었다. 하느님은 당신께만 온전한 희망을 두는 충실한 사람들에게 분명 신의를 지키신다.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는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은 고문과 모욕 그리고 죽음 등에 대한 온갖 불안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를 헛된 영웅주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태도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 어머니는 막내를 구출하는 마지막 기회를 왜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순교의 죽음을 바라는가?

어머니는 막내를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고 다녔던 일이며, 그를 낳아서 몇 해 동안 젖을 먹이고 기르고 키우고 보살폈던 일을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아마 어머니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모성애적 본능에 저항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악한 임금에게 저항하는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여인의 뱃속에서 새 생명을 자라게 하시고, 인간을 “오묘하게 지으시고”(시편 139,14), 사랑으로 돌보아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신다(시편 139,24)는 것을 그 어머니는 생각하고 체험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생명의 하느님을 확고하게 믿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어머니와 유사하게 확고하고 강한 신앙을 종종 보여준다. 유다인 백성도 오늘날까지 다른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정신으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순종”(사도 5,29)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적인 권능과 정의를 증언하고 있다.

[쌍백합, 제40호, 2013년 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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