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들의 서간: 로마서 (2)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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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7-30 | 조회수3,173 | 추천수1 | |
[사도들의 서간]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 - 로마서 (2) 지난 호에서는 로마서 1-4장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의로움과 믿음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로마서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죄의 연대성 로마 5,12에서 바오로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로 모두가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절시키는데, 이 단절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오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죽음이 아담의 죄의 결과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한 명의 죄로 우리 모두가 죽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의 연대성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낳고, 고통은 고통을 낳게 마련입니다. 내가 받은 고통은 타인에게 전가시키기 마련이고, 고통은 고통으로 복수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죄와 고통의 연쇄고리는 이미 첫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에게서도 이런 원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율법은 우리 모두가 이런 죄 속에 있음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5,13.20; 7,7-25).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모든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과 인류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5,6-11). 곧, 모든 이의 죄로 얻게 된 수난과 죽음을 복수로 되갚지 않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의 연쇄고리를 끊어버리신 것입니다. 죄의 연쇄고리가 끊어졌다는 것, 그것은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와 죽음이 사라지고 하느님과의 화해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5,12-21). 그래서 바오로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5,9-11; 20-21장).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던 명령은 예수님 제자로서 죄의 연쇄고리를 끊어냄으로서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사명을 다하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면, 굳이 죄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며 바오로를 비판했던 것 같습니다. 은총을 많이 받으려면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고 비아냥거렸던 것 같습니다(6,1). 하지만 바오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이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6,4). 사실 바오로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실천을 등한시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가 믿음으로 의화된다고 말한 것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지, 함부로 살아도 하느님이 알아서 구원해 주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바오로는 편지 곳곳에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성령의 힘에 따라 살며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로마서에서도 6-8장, 12장 이하의 내용은 모두 구원받은 이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오로는 로마 9-11장에서 유다인들의 운명을 언급합니다. 유다인들은 선조들을 통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마음이 완고해져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의로움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9,1-33). 그러나 모든 유다인들이 그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게 된 바오로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었고(11,1), 또 예수님의 첫 제자들을 포함해 예수님을 믿은 많은 이가 유다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없었다면 이방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방계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들을 비판하거나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고 권고합니다. 바오로는 올리브 가지를 비유로 들어 이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곧, 올리브나무 가지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가지들이 접붙여지긴 했지만, 결국 그들은 그 나무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고 있으니, 유다인들 앞에서 쓸데없는 자랑이나 오만스러운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11,11-24). 사실, 하느님은 당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니, 유다인들을 마냥 당신 구원 밖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9,6). 왜냐하면 하느님 당신이 직접 유다인들을 선택하셨기에, 그 선택을 물리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더라면, 다른 민족에게 구원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바오로는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11,11). 바오로에 따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 역시 처음부터 하느님 계획 속에 담겨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 유다인들을 다시금 구원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11,25-32). 이웃의 고통에 연대 책임을 느끼자 개념 없는 종교인들이 쓰나미 같은 대형 자연재해나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고통 받거나 죽음을 맞는 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 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성경에 따르면 고통과 죽음은 당연한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지은 죄의 결과로 대형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면, 그들이 당하게 된 그 고통과 죽음이 과연 그들만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죄의 연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그 죄 안에는 내 죄가 0.00001% 정도는 담겨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확대해 본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과 죽음에는 우리 모두의 탓이 조금씩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에 대해 나 역시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단순히 고통 받는 그 사람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사실, 아무런 탓도 없이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는 이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사실, 그 고통의 자리가 내 몫이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야말로 나를 대신해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라 생각합시다. 그리고 그들의 수난과 고통에 연대 책임을 느끼며, 그들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해나가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우리의 죄를 되돌아보도록 합시다. 그래야 우리 모두는 참으로 하느님과 화해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염철호 사도 요한 - 부산교구 신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부산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으며, 역서로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바오로딸, 2012년)이 있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염철호 사도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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