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2) 예루살렘의 성문들 - 2
⑤ 시온의 문
시온의 문은 예루살렘 남쪽 성벽의 서쪽에 있다. 시온의 문이라는 명칭은 이 성문이 시온 산으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아랍어로는 바브 나비 다우드(Bab Nabi Daud), 즉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설에 따르면 다윗의 무덤이 시온 산에 있기 때문이다. 시온의 문에는 많은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1948년에 있었던 구시가의 유다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다. 이 성문은 1968년 6일 전쟁 이후 다시 보수되었다. 현재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시온 산에는 성모 승천 기념 성당, 최후 만찬 기념 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등이 있다.
⑥ 야포의 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야포 도시로 통하는 야포의 문은 예루살렘 서쪽 성벽의 유일한 성문이다. 아랍어로는 바브 엘-칼릴(Bab el-Khalil), 즉 “친구의 문”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친구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실 이사 41,8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로 소개된다. “그러나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바브 엘-칼릴이라는 명칭은 이 성문이 아브라함의 묘지가 있는 헤브론 도시로 통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1898년에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는 L자 형태의 성문과 다윗 성 사이의 성벽을 헐었다. 이것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Kaiser Wilhelm II)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마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기 위해서였다. 현재 야포의 문 옆에 개방된 길은 자동차 도로로 사용된다.
⑦ 새 문
히브리어로 샤아르 하다쉬(Sha’ar Hadash)인 새 문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의 서쪽에 있다. 이 성문은 1887년에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성문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의 북쪽 근교에 자리 잡은 거주민들에게 구시가로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⑧ 황금의 문
예루살렘 동쪽 성벽에 위치한 황금의 문은 현재 닫혀 있다. 이 성문에 대한 전승들은 대단히 많지만 그 역사적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유다인들의 미쉬나(Mishnah)에 따르면 올리브 산 맞은 편 성전 동쪽에 “수사의 문(Shushan Gate)”이 있었는데 붉은 암소 예식(민수 19,1-10)을 위해 사용되었다. 헤로데 시대의 것인 이 옛 성문의 흔적이 현재 황금의 문 구조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이 성문은 아마도 피아첸차(Piacenza)의 순례자가 기원후 570년에 목격했던 것일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북쪽 문은 성전의 한 부분이었던 “아름다운 문” 옆에 있었고 그곳에 문지방과 수평부분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순례자는 황금의 문을 베드로 사도가 불구자를 치유한 “아름다운 문”과 연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사도 3,1-10) 사실 황금의 문은 로마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가 5세기 중반에 이 베드로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존재했었다.
518년경의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는 성지 주일에 예수님이 성전의 북쪽에 있던 “벤야민의 문(Gate of Benjamin)”, 즉 지금의 성 스테파노의 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황금의 문은 그 형태가 후기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631년에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가 페르시아인들이 614년에 훔쳐간 십자가를 되찾았을 때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모데스투스(Modestus)가 만들었을 가능성도 주장된다. 그런데 건축 양식과 역사적 개연성으로 보아 현재의 구조는 칼리프 아브드 알-말리크(Abd al-Malik, 685-705년)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원전 8세기에 이슬람인들은 이 성문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왜냐하면 이 성문을 통해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들이 이슬람교 대사원에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중세에는 십자군들이 일년에 두 번, 곧 성지 주일과 십자가 현양 축일에 황금의 문을 개방하였다. 황금의 문이라는 명칭은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 “아름다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호라이아(horaia)와 “황금의”를 뜻하는 라틴어의 아우레아(aurea)는 그 발음이 유사해서 혼동되어 포르타 아우레아(Porta aurea), 즉 황금의 문으로 불려졌다.
황금의 문은 십자군 시대 이후에 닫혀 있다. 현재 닫혀 있는 황금의 문에 대한 유다인, 그리스도인, 이슬람인들의 다양한 설명이 존재한다. 유다인들은 에제 44,1-3에 근거하여 하느님이 이미 이 성문을 지나셨기 때문에 닫혀 있다고 설명한다. “그 사람은 나를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다시 데리고 갔는데, 그 대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은 잠가 둔 채,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겨 있어야 한다. 다만 제후는 그가 제후이므로 여기에 앉아 주님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는 대문 현관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한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올 때 이 성문이 열린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성전으로 통하는 이 성문을 지나가셨기 때문에 황금의 문은 닫혀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닫혀 있는 이 성문은 예수님이 최후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때 열린다고 한다. 한편 이슬람인들은 장차 의인이 마지막 심판자와 함께 이 성문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황금의 문이 두 개의 문, 곧 자비의 문과 회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10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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