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다윗 왕위계승 설화(2사무 9장-1열왕 2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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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1-06 | 조회수3,511 | 추천수1 | |
역사서 해설과 묵상 (79) 다윗 왕위계승 설화(2사무 9장-1열왕 2장) ①
사무엘기 상하권 제5부(2사무 9-20장과 1열왕 1-2장)는 다윗의 왕위계승에 얽힌 왕궁설화요 조정실록(朝廷實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사무엘기 하권 20장에서 끝나지 않고 열왕기 상권 2장 솔로몬의 왕위계승까지 연결된다. 사무엘기 하권 9-20장과 열왕기 상권 1-2장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빼어난 산문 가운데 하나다. 이 왕위계승사는 그 경위를 직접 눈으로 본 어느 증인에 의해 쓰였는데, 그 시기는 솔로몬 통치(기원전 970-933년) 전반기, 곧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중엽에는 현재의 형태에 가까운 고정된 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다윗 왕위계승 설화는 다윗이 요나탄의 아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시작된다(2사무 9장). 사울의 아들 요나탄과 다윗의 우정은 사무엘기 상권에 잘 묘사되었다. 요나탄이 아버지를 거역해가면서도 다윗을 감싸주고 끝까지 우정을 지킨 은혜를 다윗은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울의 후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사울 집안에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탄을 기억하여 그에게 자애를 베풀고자 한다”(2사무 9,1).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요나탄의 아들 ‘므피보셋’이었는데, 그는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다윗은 므피보셋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자신과 한 식탁에서 먹도록 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탄을 기억하여 너에게 자애를 베풀고자 한다. 너의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땅을 너에게 돌려주겠다. 그리고 너는 늘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어라”(2사무 9,7).
이것은 유일한 예외다. 사무엘기 하권 5장 6-8절을 보면,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소경과 절름발이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소경과 절름발이는 왕궁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를 허락했는데, 그것이 므피보셋의 경우였다.
사무엘기 상권 9장이 비록 다윗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지만 다윗 왕위계승 설화에 속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려면 사울의 후손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했다. 요나탄의 아들 므피보셋은 왕위를 주장할 위협적 인물은 못되지만, 유사시에는 왕권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2사무 16,3 참조). 다윗이 므피보셋에게 베푼 호의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것을 독자는 파악해야 한다. 다윗은 므피보셋을 자신의 감시 아래 두려는 것이고, 또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유화책을 쓰려는 의도였다.
사무엘기 하권 9-12장에는 솔로몬이 탄생한 경위가 아주 길고 자세히 언급되었다. 다윗 왕위계승 설화에서 결정적인 사건의 발단은 사무엘기 하권 11장이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부하장교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빼앗아 아내로 삼고 밧 세바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솔로몬’이다. 다윗은 완전범죄를 꾀했다. 충성스런 신하 우리야를 적군의 손을 빌어 죽였다. 그러나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탄 예언자가 개입해 다윗의 죄악을 고발했다. 다윗 왕위 계승사에서 예언자가 개입하는 일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난 아들이 솔로몬이었고, 훗날 그가 결국 다윗의 왕위를 잇게 되었다.
묵상주제
인간의 죄악은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막지 못한다. 다윗이 죄를 저질렀지만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심하게 말하면, 고맙게도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더 잘 이루어진다. 만일 다윗이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솔로몬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후손에서 구세주 예수님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와 잘못을 선으로 바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2014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80) 다윗 왕위계승 설화(2사무 9장-1열왕 2장) ②
사무엘기 하권 13장부터는 솔로몬의 적대세력이 될 인물들이 어떻게 제거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사무엘기 하권 13-19장 ‘압살롬의 반란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다윗의 장남 암논, 유력한 왕위 후보자 압살롬이 제거된 경위와 전혀 뜻밖의 인물인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배경을 말하고자 한다.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 왕국의 취약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남쪽 유다지파 출신 다윗이 북쪽 열 지파를 홀대한 결과였다. 압살롬은 북쪽 지파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임금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압살롬은 ‘평화의 아버지’라는 뜻인데,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압살롬은 온 나라에 칼부림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이 칼부림은 사무엘기 하권 12장 10-12절 나탄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 말씀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2사무 12,10).
우리는 여기서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인다’는 역사서 전체를 꿰뚫는 주제를,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역사서 저자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열왕기 상권 1-2장에 나오는 ‘아도니야의 이야기’ 역시 솔로몬의 적대세력이 될 인물이 어떻게 제거되는지 설명하려는 의도로 쓰인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다윗 왕위계승 설화’를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구분하여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본론은 사무엘기 하권 13-20장 ‘압살롬의 반란 이야기’다. 여기에 서론격으로 ‘솔로몬의 탄생 이야기’(2사무 9-12장)가 붙었고, 결론은 열왕기 상권 1-2장 ‘아도니야의 이야기’로 끝난다. 결국 사무엘기 하권 9장부터 열왕기 상권 2장까지는 ‘솔로몬의 왕위 계승사’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왕위계승’에 관한 이야기는 온갖 인간적 욕망과 음모가 얽혀 진행된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와 갈등을 묘사하는 저자의 뛰어난 필치는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고대 이스라엘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가 인간심리에 이처럼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하느님의 책인 동시에 인간의 책이라는 것을 말한다.
다윗 왕위계승 설화는 설화문학의 걸작이다. 저자는 감동적인 인간적 진리와 함께 면밀하게 관찰되고 보고된 사건의 시리즈를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사건들은 흐름을 바꾸려고 개입하는 조종자가 전혀 없이 물고 물리며 진행된다.
거기 등장하는 다양하고 대조적인 인물도 인상적이다. 노예근성이 있는 ‘치바’라는 인물을 보라! 그는 자기 주인 므피보셋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했고, 환궁하는 다윗에게 민첩하게 달려와 지나치게 아양을 떨었다(2사무 16,1-4; 19,18-19). 그의 주인 ‘므피보셋’이라는 인물을 보라! 그가 당황해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면 도대체 그가 치바의 모함을 당했는지 아니면 다윗을 배반했는지 알 수가 없다(2사무 19,26-29).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트코아의 여인’을 보라! 그 여인은 꾸며낸 이야기로 다윗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니, 땅바닥에 쏟아져 다시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2사무 14,14). 그 여인은 빗대는 이야기로 압살롬을 은근히 두둔하면서 임금이 그 속뜻을 알아차리자 다음과 같은 말로 임금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지혜로우신 임금님께서는 하느님의 천사처럼 지혜로워 세상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2사무 14,20).
묵상주제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주실지 누가 알겠소?”(2사무 16,11-12). [2014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81) 다윗 왕위계승 설화(2사무 9장-1열왕 2장) ③
다윗 왕위계승 이야기의 설화자는 각 인물들을 실감나게,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주석이 쓸모없을 정도다. 야심 많은 압살롬은 “자기가 탈 병거와 말들을 마련하고, 자기 앞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쉰 명이나 거느렸다. 또 누가 그에게 가까이 와서 절할 때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을 맞추곤 하였다. 압살롬은 임금에게 재판을 청하러 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2사무 15,1.5).
인물들의 특징은 복잡다단하게 나타난다. 요압은 다윗을 향한 충성심, 무자비하고 냉혹한 성격, 관대함 그리고 전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집념이 뒤섞인 인물로 등장한다. 다윗의 모습은 특별하다. 착하고 계산적이지 않으며, 예민하면서도 회개할 줄 알고, 사람을 단호히 처단하면서도 용서할 줄 알고, 다정하면서도 한없이 연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다윗에게서 한 인간을 발견한다. 다윗은 인생의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본다. 그는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알았고, 그의 신앙은 당시의 일반적인 통념을 뛰어넘는다. 만일 하느님께서 호의를 돌이키신다면 계약궤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2사무 15,25).
다윗 왕위계승 설화에는 공식적인 연감 같은 데서 보듯이 외적으로 내세우려 하는 경향이 전혀 없다. 왕위계승 설화의 저자는 그런 것보다는 개인의 인물됨에 관심을 보인다. 그의 필치 덕분에 각 사건의 독특한 특징이 드러난다. 저자는 여기서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어떤 교훈도 주려 하지 않는다. 윤리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날 뿐이다. 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죄의 치명적인 결과들은 저자가 강조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저절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섭리를 강조하려고 기적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이야기를 읽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안목 있는 사람에게는 늘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행동은 사건 전체를 은밀히 포괄하며,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적 행위와 결정이 결국은 하느님의 행동을 돕는다.
고대 근동의 문학에서 이 이야기와 비교될 수 있는 작품이 전혀 없다. 고대 근동의 문학은 이와는 다른 역사적 장르다. 건조한 내용의 목록(수메르-아카디아의 patesis 문헌)이거나 호교론적인 어조(아시리아의 연감, 이집트 왕궁서사들의 작품, 유력한 인물의 무덤 안 벽에 있는 그 인물의 자서전)로 쓰였거나 또는 상상적인 자료들(이집트의 역사소설)이 대부분이다. 이런 근동의 고대 문학은 개인들의 관계에 의해 촉발된 사건의 상세한 관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적인 설명을 하면서 고대 근동문학은 사건들의 전후관계라는 개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또 그 사건이라는 것도 신들의 변덕에 의해 일어난 경우가 많다. ‘이집트 왕궁의 문헌’이 다윗 왕위계승 설화에 가장 가까운 예가 될 수 있으며, 아마도 다윗 왕위계승 설화의 저자는 그런 문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 왕위계승 설화에서 보듯이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와 갈등을 묘사하는 그의 필치와 관심은 전적으로 고유한 것이다.
다윗 왕위계승 설화와 야휘스트(J)의 연관성은 분명하다. ‘선과악’이라는 표현,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재주, 구체적인 심리묘사, 후손에 대한 관심, 그리고 상속권(相續權)이나 장자권(長子權)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관심 등이 공통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휘스트 사료와 다윗 왕위계승 설화는 기원전 10세기 동시대의 것이고, 다윗 왕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저자가 다윗과 솔로몬을 결코 추켜세우지 않기에 우리는 그를 다윗 왕조의 적대세력으로 생각할 정도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를 솔로몬의 옹호자라고 상정할 수 있다. 저자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 결국은 ‘솔로몬의 등극’으로 끝나는 것을 하느님의 계획으로 조망하기 때문이다.
묵상주제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시편 84,11.13). [2014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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