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25: 예루살렘 성전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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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1-15 | 조회수3,880 | 추천수1 | |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5) 예루살렘 성전 1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 곧 그분의 현존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의 장소, 곧 친교와 경신례의 장소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의미는 다음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이어라. 감사드리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드리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며 그분의 성실은 대대에 이르신다.”(시편 100,1-5) 현재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이슬람의 황금 돔 대사원이 있는 곳이 바로 과거 유다인들의 성전이 있었던 장소이다. 성전은 언제 세워졌고 또 언제 파괴되었는가? 이제 그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를 살펴보자.
■ 솔로몬의 성전
다윗이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을 때, 그는 그곳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예루살렘은 그 어떤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도시로서 북과 남을 가르는 경계에 위치하여 다른 지파들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고 다윗에게 정치적 독립을 선사하였다. 사실 성조들과 연관이 있는 여러 성소들이 있었으나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종교적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다. “키르얏 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주님의 궤를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기고, 그의 아들 엘아자르를 성별하여 그 궤를 돌보게 하였다.”(1사무 7,1) 마침내 계약의 궤는 다윗의 성에 우선 이집트 탈출 때처럼 천막 아래 모셔졌다.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2사무 6,12-18)
다윗의 성 북쪽에 위치한 언덕 꼭대기에 바위가 있었다. 그곳은 아마도 가나안인들의 제사 장소로 사용된 듯하다. 구약성경은 이 장소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가드가 그날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올라가시어 주님을 위한 제단을 세우십시오.’ 다윗은 가드의 말에 따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곳에 올라갔다. 아라우나가 내려다보니, 임금과 그 신하들이 자기에게 건너오고 있었다. 아라우나는 곧 임금 앞에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라우나는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무슨 일로 이 종에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다윗이 대답하였다. ‘그대에게 타작마당을 사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아 드리려고 하오. 그러면 재난이 백성에게서 돌아설 것이오.’”(2사무 24,18-21) 다윗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치기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였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2사무 24,25)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는 일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나탄의 예언에서도 언급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사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수도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언덕, 곧 옛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위에 궁전과 성전을 세우려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이곳은 모리야 산으로도 불린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그리하여 솔로몬은 기원전 96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다. 티로 임금 히람은 레바논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보냈다.(1열왕 5,15-32; 2역대 2,2-15) 이것이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1성전(First Temple)이다. 솔로몬은 이 성전에 계약의 궤를 모셨다. 이 성전을 묘사하는 성경 본문(1열왕 5,15-7,5)은 이집트 탈출 이후 하느님이 모세에게 만남의 천막을 세우기 위해 명령하신 본문(탈출 25-31장; 35장)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파괴되었다.
■ 제2성전
약 50년가량의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귀환하였다. 그들은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쳤다. 성전의 재건축은 기원전 537년에 세스바차르에 의해 시도되었고,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지원으로 기원전 520-515년 동안 즈루빠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유배 이후 다시 세워진 성전을 우리는 제2성전(Second Temple)이라 한다. 사실 기원전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뒤이은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상실이요 위기였다. 유배에서 되돌아온 유다인들의 주된 관심사며 과제는 상실의 회복, 과거의 복구와 재건이었다. 이 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통하여 가시화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는 동시에 유배 이후 유다 민족의 권위 있는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했다. 새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자리에 같은 구조로 세워졌으나 그 규모는 첫 번째 성전에 비하여 작았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제2성전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헤로데 대왕(King Herod the Great, 기원전 37-4년)에 의해 더 웅장하게 확장되었다. 이두매아인인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다시 개조하는 작업을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였다. 성전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면적은 두 배로 늘어났다. 이 헤로데의 작업은 요세푸스의 문헌인 『유다 전쟁사』 5권 184-237과 『유다 고대사』 15권 380-425뿐 아니라 라삐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약 5세기 동안 유다인들의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던 제2성전은 제1차 유다 항쟁이 진압되었던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의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이 성전은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132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로마 황제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불렀고 성전이 있었던 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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