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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 그루터기: 군마를 늘려서는 안 된다(신명 1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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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5 조회수2,880 추천수1

[말씀 그루터기] “군마를 늘려서는 안 된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지켜야 할 것, 세 가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임금은 군마를 늘리거나, 그것을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 임금은 또 아내를 늘려 마음이 빗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은이나 금을 너무 많이 늘려서도 안 된다”(신명 17,16-17). 

 

그 가운데 첫 번째로 언급된 군마라는 것, 군사력이라는 것은 인간적 힘을 대변합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군마를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전형적인 모습은 갈대 바다 앞에서, 뒤에서 추격해 오는 이집트의 기마와 병거를 보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모세가 했던 말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탈출 14,13-14). 싸움에 이기는 것은 기마와 병거의 숫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잠자코 있음”이란 내가 움직여서, 내 힘으로 싸워 이기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영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러 보내며 “그곳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 그들이 사는 마을들이 천막으로 되어 있는지 요새로 되어 있는지”(민수 13,18-19)를 살피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됩니다. 그렇게 정찰을 하러 간 사람들은 아군의 군사력과 적군의 군사력을, 인간적 힘들을 비교합니다. 결과는 좋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13,33)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주저앉아 울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우리의 힘이 그 땅을 얻어내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 땅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판관 시대에도 하느님은 기드온에게, “네가 거느린 군사들이 너무 많아, 내가 미디안을 너희 손에 넘겨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나를 제쳐 놓고, ‘내 손으로 승리하였다.’ 하고 자랑할까 염려된다.”(판관 7,2)고 말씀하시고는, 수만 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삼백 명만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게 하십니다. 삼백 명이 미디안과 싸워 이긴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다윗은,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1사무 17,45)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갑옷과 무거운 칼을 지니고는 걸을 수도 없었지요. 그의 무기는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군마에 의지하는 자들”을 불행하다고 선언하며, “그들은 병거의 수가 많다고 그것을 믿고 기병대가 막강하다고 그것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는다.”(이사 31,1)고 말합니다. 제가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사야는 특히 이집트의 군사 원조를 구하러 가는 이들을 비판하며 이집트의 군마는 영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라고 말합니다. 

 

호세아서 14장 4절도 같은 노선입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이 절에서는 군마를 타는 것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같은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군마와 우상은 이스라엘이 의지하려고 했던 것들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시편들에서도 같은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병거를, 저들은 기마를 믿지만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네. 그들은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 굳건히 서 있으리라”(시편 20,8-9). 

 

이만 하면 됐지요? 군마를 늘리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는 군마를 늘린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솔로몬 시대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솔로몬을 찾아올 때에 “은 기물과 금 기물, 옷과 무기, 향료와 말과 노새들을”(1열왕 10,25) 예물로 가져왔고 그래서 솔로몬에게는 “병거가 천사백 대, 군마는 만 이천 마리”(10,26)가 있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집트에서 말을 들여다가 히타이트와 아람 임금들에게 되파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10,28-29). 잘 한 일일까요?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영화로운 시대였습니다. 솔로몬의 그릇들은 모두 순금으로 되어 있었고, 그 시대에 은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도 유명하지요. 젊었을 때에 일찍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여 받았던 솔로몬의 슬기로운 재판과 그의 박학한 지식은 여러 나라들에 알려졌습니다. 다른 나라들과의 교역도 많았습니다. 상선들이 금, 은, 상아, 원숭이와 공작새를 실어 왔다고 합니다. 아차차, 솔로몬의 가장 큰 업적을 빠뜨렸네요. 솔로몬은 여러 해에 걸쳐 성전과 왕궁을 지었습니다. 물론 그 공사를 위해서도 다른 나라들에서 많은 물자를 구해 왔습니다. 

 

솔로몬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것은 제가 역사서 시험에 출제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대단히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여기지요. 역대기에서는 그가 성전을 지었다는 점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잘못들을 거의 덮어 줍니다. 그러나 열왕기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알고 있는 그의 잘못은, 많은 정략결혼을 하다 보니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따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꼭 결혼만의 문제는 아닐 테고, 여러 나라들과 두루두루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기도 해야 했겠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잘못들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야기한 성전과 왕궁 공사, 그건 누가 다 지었을까요? 물론 백성의 부역입니다. 그 비용은 누가 대었을까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아시다시피 대규모 토목 공사를 했던 임금들치고 백성이 좋아했던 임금은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그 부역이나 조세는 공평하게 매겨지지 않았습니다. 북쪽 지파들은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다음 예로보암이 르하브암을 찾아가 솔로몬이 백성을 힘겹게 했던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청했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곧 왕국이 갈라진 것도 실제로는 솔로몬이 이미 씨를 뿌려 놓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 대한 열왕기의 평가는,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지도 않았다.”(1열왕 11,33)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이 별로 좋지 않지요? 

 

다시 군마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솔로몬 시대에 군마를 많이 길렀다는 것, 그만큼 “내 힘”을 길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 나라 출신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았던 것도, 하느님께 순수한 신앙을 지키지 못하면서라도 외교 정책으로 나라의 부와 안전을 도모하려는 계산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금과 은이 길에 널린 돌처럼 많으면 무엇 합니까? 그가 금과 은과 부인들과 군마를 자신의 힘이라고 여길 때에, 그것이 바로 ‘다른 신들’이 되는 것 아닌가요?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솔로몬이 이룬 업적들 때문에 솔로몬을 훌륭한 임금이라고 여긴다면 열왕기 저자가 우리를 보고 ‘속물’이라고 할 것이라고요. 솔로몬은, 첫머리에 인용한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세 가지를 모두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왕국을 분열로 이끌었습니다. 가장 화려하게 보이는 그가 사실은 실패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군마를 많이 기르지 말라는 것. 인간적 힘을 가지게 되면 그 힘에 의지하고 모든 것이 그 힘으로 결정된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전쟁에 이기고 나서는 내 군마 덕분으로 이겼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혹시 내가 군마를 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공적으로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나머지, 나의 힘을 길러 놓고는 나중에는 내 힘 덕분으로 이런 일을 했다고 자기 업적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업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복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신의 군마로 이룬 업적은 하느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준마의 힘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장정의 다리를 반기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당신 자애에 희망을 두는 이들을 좋아하신다”(시편 147,10). 

 

[땅끝까지 제79호, 2014년 1+2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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