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26: 예루살렘 성전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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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2-13 | 조회수4,171 | 추천수1 | |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6) 예루살렘 성전 2
■ 예수님 시대의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은 당시 유다인들의 삶에서처럼 역사적 예수님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유배 이후 세워진 제2성전인데, 헤로데 대왕에 의해 증축된 것이다. 헤로데의 성전산(Herodian Temple Mount)의 크기는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 가량 되었다.
성전은 여러 경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되었던 “이방인의 뜰(Court of the Gentiles)”,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뜰(Court of the Women)”,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을 위한 “이스라엘의 뜰(Court of the Israelites)”, 그리고 사제들에게만 허용된 “사제들의 뜰(Court of the Priests)”이 있었다. 그래서 전체 성전산은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의 뜰”로 나눌 수 있었다. 이 둘 사이에는 난간이 있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명각(Inscription)에 경고문이 새겨졌다. 즉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고 이를 어길 경우 죽음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성전산의 넓은 뜰을 둘러싼 벽들이 사방에 있었고 성전의 뜰 안으로 통했던 문들과 계단들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현재 성전산 부근 남쪽에서 우리는 정결예식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목욕 시설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성전산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안토니아 성채(Antonia fortress)가 있었고 마태 4,5에 언급되는 성전 꼭대기는 성전산의 남동쪽 끝이었을 것이다.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5-7)
성전산의 사방 벽에는 주랑들이 있었는데 남쪽의 왕궁 주랑(Royal Portico)의 기둥들은 네 줄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주랑들은 두 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쪽에는 “솔로몬의 주랑(Solomon’s Portico)”이 있었다. 이 주랑들에서는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하였고,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파는 장수들과 환전상들이 있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 때의 일을 전하는 루카 2,41-52에 따르면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6절) 그리고 마르 11,15-19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전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요한 10,22-39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논쟁 이야기이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마태 26,59-66; 마르 14,55-64; 루카 22,66-71)과는 달리 최고 의회에서의 예수님 재판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 재판의 중요한 요소들을 10,22-39의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 안에서 소개한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요한 10,22-23) 요한 10,30에 따르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다인들은 그를 신성모독으로 비난하며 돌로 치려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갓 사람이면서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음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위해 우리의 관심은 요한 본문의 시간적 배경, 즉 성전 봉헌 축제에 집중된다. 이 축제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1마카 1,54; 다니 9,27; 11,31; 12,11)을 세운 지 3년 후, 즉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 25일에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성전과 그 제단이 정화된 사건(1마카 4,36-61; 2마카 10,1-9)을 기념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요한 본문의 성전 봉헌절 축제에 참여하는 유다인들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와 함께 그것을 초래한 인물, 즉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신성모독적 거만에 의해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산의 솔로몬 주랑은 사도행전에서도 소개된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사도 3,11)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사도 5,12)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은 “여자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그리고 성소(Sanctuary)와 지성소(Holy of Holies)로 이루어졌다. 성소와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가 9m, 높이가 18m 가량이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사제만이 1년에 한번, 즉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들의 뜰”에는 성전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1-42)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아름다운 문”으로 불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사도 3,1-2)
헤로데 성전의 벽들 중에서 서쪽 벽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높이 18m, 너비 60m의 이 서쪽 벽(West Wall)을 흔히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곳을 찾는 유다인들이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성전과 조상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통곡하기 때문이다. 이 통곡의 벽은 현재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장소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다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순례하는데, 그들의 기도와 염원을 쪽지에 적어 벽의 돌 뜸새에 끼워 넣는다. 현재 통곡의 벽은 아래에서 약 열 한 번째까지의 큰 돌은 헤로데 대왕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중간 크기의 다섯 줄은 초기 아랍 시대, 그리고 나머지 윗부분의 조그만 벽돌들은 19세기의 것이다. 현재도 이 통곡의 벽에서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행사들이 다양하게 벌어진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2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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