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리] 성경의 세계: 헤로디온 성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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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6-23 | 조회수2,636 | 추천수1 | |
[성경의 세계] 헤로디온 성채
헤로디온 성채는 베들레헴 동남쪽 6km 예루살렘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3년에 시작해 20년에 완공했다. 둥글게 쌓은 성채 안에 왕궁을 짓고 별궁으로 사용했다. 모반과 쿠데타를 두려워했던 헤로데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피난처였다. 행정시설은 성채 아래쪽에 따로 구축되어 있었다. 그들마저 헤로데는 믿지 못했다.
성채 꼭대기에 서면 멀리 사해와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보인다.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고 동서남북에 반원형의 망루(전망 타워)를 세웠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는 예리코에서 죽었고 시신은 헤로디온 성채에 묻힌 것으로 되어 있다. 대신들이 보석으로 장식한 관에 넣어 이곳 어딘가에 묻었다는 것이다. 2007년 이스라엘의 허락을 얻은 고고학자들이 헤로디온 성채 아래쪽에서 왕릉 발굴 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헤로데는 기원전 37년부터 33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수많은 요새와 도시를 건설했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리모델링했다. BC 20년에 시작해 46년을 끌었던 대역사다. 하지만 AD 70년 부서지고 만다. 독립운동에 넌더리가 난 로마인들이 돌 위에 돌이 얹혀있지 못할 만큼 파괴했다. 유다인의 정신적 구심점을 없애려는 전략이었다.
항구도시 카이사리아도 헤로데의 작품이다. 12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당시까지 이스라엘 항구는 야파(Jaffa)가 전부였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위해 레바논에서 향백나무를 실어오던 항구였다. 카이사리아가 문을 열자 로마의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스라엘 농산물도 더 많이 수출할 수 있었다. 헤로데의 치적을 알리는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다.
헤로데는 항상 반란을 두려워했다. 아내는 물론 자식까지 처형할 만큼 민감했다. 끝없이 펼쳤던 건설 사업은 두려움을 벗는 수단이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회유책이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온 성채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유다인의 1차 독립운동이 실패했을 때 저항군들은 마사다 요새에서 3년을 버티었다. 그만큼 견고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헤로디온 성채 역시 예수님 시대의 헤로데 안티파스가 즐겨 사용할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별궁이었다. 하지만 독립전쟁 와중에서 저항군들이 요새로 사용했기에 파괴를 면할 수가 없었다.
[2014년 6월 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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