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담긴 하느님 생각] “지혜가 어디에서 오리오?”(욥기 28,20)
떠오르는 생각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다.”(집회 6,14-16ㄱ) 고독하고 절망에 처한 상황에서 고인 아픔을 흐르게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물줄기가 바로 친구라는 존재다. 자살충동을 느꼈던 젊은이들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줄 친구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섣부른 충고가 역효과를 내는 이유는 마음을 나누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을 때에야 쓴 말이 약이 된다.
1. 죽고 싶은 욥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방문한다.(욥 2,11-13) 그들은 처참한 불행 속에 놓인 욥을 보고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커서 그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무거운 침묵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욥의 비탄의 말로 깨진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3,3) 욥이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11절) 하고 외치는 절규는 출구를 찾지 못한 막다른 골목의 절박한 체험에서 솟아나는 외침이다. 그런데 생명을 저주하는 욥의 이 한탄은 표면적으로는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의 위협 없이 살기를 바라는 생명에 대한 강한 열망의 표출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죽음을 향해 가는 운명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고 역설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상태이길 바라는 것이다. 또다시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생명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면에서 고통스런 삶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격렬하게 시도한다. 욥의 이 죽 음의 체험은 사실 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거쳐야 하는 보편적인 운명이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20절) 그는 인간 운명의 부당성에 대해 하느님께 이유를 따져 묻는다. 욥의 용기 있는 의문 제기는 독자에게 삶의 의미를 대면하게 한다.
2. 욥 친구들의 위로
욥을 찾아온 세 친구들의 침묵행위는 욥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는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듯하다.(2,11-13) 그러나 4장부터 소개되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보면 그들이 욥의 고통을 같은 마음으로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표현할 적당한 시간을 기다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세 친구 모두 욥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를 전혀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이 시사적이다. 각자 일방적으로 욥에게 들이닥친 불행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친구 엘리파즈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제시한다.(4-5장) 죄악으로 재앙을 뿌린 자는 불행의 결과를 거두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아벨의 경우(창세 4장)처럼 죄 없는 이가 불행에 처한 경우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한다.
친구 빌닷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임을 밝히며 하느님을 변론한다.(8장) 그는 욥이 진정 무죄라면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가 그의 자식들의 죄로 인한 벌이라고 말한다. 사실 자식들의 죄악으로 인해 벌어진 모든 불행이라고 본다면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다만 빌닷의 논리를 받아들이려면 손쉽게 모든 것을 자식들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파생되는 또 다른 고통을 마주해야 한다. 그런데 1장에서 욥은 자식들이 짓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번제물을 바쳤다는 정보가 제시되었다.(5절) 그럼에도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식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야만 할까? 이 또한 답이 되지 못한다.
셋째 친구 초바르도 전통적인 가르침의 입장에 서서 하느님만이 지혜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욥의 고통은 그의 죄악으로 인해 생긴 결과라고 주장한다.(11장) 그런데 마지막 장에 언급된 하느님의 평가를 통해 세 친구의 의견은 모두 진실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2,8)
3. 욥의 답변
욥의 세 친구가 고뇌의 과정 없이 고통의 의미를 맹목적으로 강요할 때 욥은 자신의 견해를 정확히 밝히며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맞선다. 엘리파즈의 말에 대한 항변으로 욥은 하느님을 향해 대든다. 인간을 다루는 하느님의 방식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시편 8편을 인용하여 비꼬아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아침마다 그를 살피시고 순간마다 그를 시험하십니까?”(욥 7,17-18) 위대하신 하느님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이시려면 한낱 입김일 뿐인 인간을 엄하게 다루시는 모순된 행위를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20절 참조)
빌닷의 말에 대한 대답에서도 욥은 하느님의 부당함을 들어 항의하는데 이는 결국 선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려는 갈망이다. 특히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자신의 작품을 멸하는 독단적인 행위(10,8)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모순을 지적한다.(15절) 그럼에도 욥은 하느님이 인간을 잊지 않으셨다는 확신으로 여전히 선한 하느님을 믿겠다고 고백한다.
초바르의 말에 대한 답변에서도(12-14장) 욥은 여전히 선하신 하느님을 찾는다. 이것이 욥의 위대한 신앙의 행위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적인 하느님의 행위 앞에서도 그분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것은 깊은 믿음의 표현이다. 이러한 욥의 도전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귀한 물음들이 솟아나게 한다.
4. “지혜가 어디에서 오리오?”
28장에 지혜의 찬가가 나온다.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이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28절)라는 말로 지혜에 대한 정의가 제시된다. 이 지혜의 찬가에 욥기에서 제기된 문제가 암시되었다. “지혜가 어디에서 오리오?”(20절)라는 중요한 질문이 주어지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하느님만이 홀로 지혜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죽음이 지혜에 대해서 풍문으로만 들었다는 정보가 나온다.(22절) 곧 우리가 아는 지혜, 하느님은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 것이지 실제 체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욥의 처지를 설명할 수 있다. 욥은 주님을 경외하며 흠 없이 지혜롭게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되었다.(1장) 그런데 그의 문제는 그가 아직 죽음을 체험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가 지혜를 향한 결정적인 걸음을 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욥이 지혜의 최종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 욥은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
[야곱의 우물, 2013년 8월호, 민남현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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