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삶과 영성] 성령의 선물
베드로가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사도 10,44-46)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내림
베드로가 행한 ‘이러한 일들’은 그가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식솔들 앞에서 했던 복음선포를 가리킨다. 베드로가 그들 앞에서 한창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온다. 그 결과 그들은 신령한 언어로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송하였다. 이른바 이방인들을 향한 성령강림 사건이다.
이를 보면서 가장 놀란 사람은 베드로와 함께 코르넬리우스의 집에 온 ‘할례 받은 신자들’ 곧 유다인들이었다. 그리스 성경에는, 그들이 놀란 근본적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심지어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사도 10,45)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성경으로 보면 10장 45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심지어”다. 이 단어는 베드로와 함께했던 유다인들의 내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들 생각에, 하느님의 은총은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긍휼과 자비 밖에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비해 우월하다는 자부심은 일순간에 깨져 버렸다.
나아가 그들이 크게 놀란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내려온 것이 아니라 쏟아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 유다인들에게 내렸던 성령이 지금 이방인들에게도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이 점은 베드로에게 참으로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10,47)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말에서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이란 표현은 유다인들이 오순절에 체험한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유다인들을 위한 사건이었다면, 지금 일어난 이방인들을 위한 성령강림은 유다인들의 오순절 성령강림과 전혀 다르지 않다.
베드로는 또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승천 직전에 하셨던 말씀인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1,5)를 기억한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다른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코르넬리우스 사건을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11,16)
베드로는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유다인과 이방인,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구별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망설임 없이 이렇게 추론한다.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허락하시면서 당신 구원 계획의 대상으로 인정했다면, 교회도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사도 10,47-48)
하느님께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셨는데, 누가 감히 그들에게 물로 세례 주는 것을 금할 수 있을까?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식솔들을 성령이 충만케 하심으로써, 베드로가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줄 수밖에 없는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
혹자는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식솔들이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고 구원받았으면 그것으로 됐지, 왜 종교적 의식에 불과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우도(右盜)를 지적할 수 있다. “우도가 물로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도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분명 구원받지 않았던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물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물로 받는 세례는 필요하다. 베드로가 했던 말,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는 물로 받는 세례가 필요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는 신앙을 공식적으로 고백하며 교회에 정식으로 입문하는 의식이다.
조금 전 언급한 우도는 ‘예수님의 시대’를 살았지만, 우리는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친교와 일치는 교회를 통해서 특별히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성사들(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성사들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식솔들에게 세례성사를 베푼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른 것이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마태 28,19) 그러므로 세례성사는 죄 사함의 표시인 동시에 교회에 공식적으로 입교함을 가리킨다.
또 세례성사는 물론이요 다른 성사들이 교회 안에서 거행될 때 종교적 의식에 불과한 형식주의로 빠지는 점은 개선되어야 하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존중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성령과의 개인적 체험만 중시하면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사들을 형식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베드로가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사도 10,44)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식솔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듣던 중에 성령을 받았다. 이는 강론이나 강연에서 말씀을 들을 때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신자들에게 일어남을 보여준다. 영적 변화나 회심 체험은 기도나 피정 중에 또는 안수를 받을 때 일어나기도 하지만, 구원의 말씀을 듣는 중에도 일어난다.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은 하느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시간이요, 정신적, 영적인 문제는 물론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되는 시간이다. 말씀을 듣는 중에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말씀을 듣는 시간에 조는 사람이 많다. 졸지 않는다 해도 강론 말씀에 열중하기보다는 딴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보를 읽거나 묵주기도를 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을 들을 때는 코르넬리우스가 그러했듯이 “지금 저희는 주님께서 선생님께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 함께 하느님 앞에 모였습니다.”(10,33)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강론 시간을 잠자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몇 년 전 한 종교갤럽에서 조사를 했다. 조사의 대상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만둔 전국의 고등학생 1,200명이었다. 질문은 ‘왜 교회에 다니지 않는가?’였다. 이 질문을 던진 이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예상했었다. ‘교회가 재미없어서 다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예쁜 여자애가 없어서, 멋진 남자애가 없어서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응답은 없었다. 놀랍게도 첫째가는 응답은 ‘말씀에서 어떤 위안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였다. 젊은 고등학생들조차도 강론말씀에서 오는 위로를 갈구하고 있다. 그들이 언뜻 보면 예쁜 여학생, 잘생긴 남학생을 찾아 교회에 오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속마음은 생명의 말씀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야곱의 우물, 2013년 10월호, 송봉모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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