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언어를 두드리다] 과녁에서 빗나가다
죄, 하마르티아의 어원
그리스어로 ‘죄’를 ‘하마르티아 ?μαρτ?α’라고 하는데 이 낱말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이 낱말을 죄의 뜻으로 쓰고 있진 않다. 그는 오히려 화살이나 창 따위가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맞은 것을 하마르티아라 했다. 이처럼 원래 이 낱말은 물리적 세계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던 것이었다.
어원적으로도 이 낱말은 죄와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인도 ?유럽어 공통 조어 중 ‘내 몫이 있다, 참가하다; 기억하다’를 뜻하는 어간 *smer ?에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a ?가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 ‘내 몫이 없다, 끼어들지 못하다; 기억하지 못하다’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낱말 하마르티아는 ‘자기의 몫이 없다’ 또는 ‘자기가 할 일이 없다’라는 뜻에서부터 ‘실패하다’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인도 ? 유럽어족은 인도에서부터 유럽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언어의 가족을 나타내는 말인데 인도어, 페르시아어, 러시아어를 비롯한 슬라브어와 영어, 독일어와 같은 게르만어. 라틴어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같은 로만스어 계통의 언어 그리고 그리스어를 포함하고 있다. 어원학자들은 이 낱말의 변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smer ?> *??sm?t ?> *a?smart ?> *??μαρτο ‘자기 몫이 없는’
이와 관련된 다른 언어의 낱말들로는 산스크리트어의 smar ?ati(그는 기억하다)와 라틴어의 mer ?m?re(얻다, 획득하다), me ?mor ?ia(기억)가 있으며 그리스어의 μ?ρο?(몫, 부분), μ?ριμνα(참견, 관심, 근심), μο?ρα(나눠준 몫, 운명), ε?μαρμ?νη(받은 몫, 운명)와 같은 낱말들도 같은 어간을 공유한다.
아리스토렐레스의 하마르티아
이 낱말이 자연 세계에서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적 실패나 타락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때인 플라톤 시대부터다.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13장 1453a 10에서 “비극의 주인공을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지만,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하마르티아’ 때문에 불행을 당하는 인물”로 설명했다. 이때 하마르티아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말을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도덕적 결함’이나 ‘성격의 결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단순히 ‘판단 착오’나 ‘실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를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라이오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기에 숲 속에 버려진 뒤 이웃 나라인 코린토스의 왕 필리보스에게 양자로 입양된다. 자라서 델포이의 신탁을 통해 자신이 이런 저주받은 운명임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친아버지로 알고 있던 필리보스를 떠난다. 하지만 코린토스 반대편에 있는 테베로 가다가 길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테베를 스핑크스의 횡포에서 구한 상으로 과부가 된 왕비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신탁은 이루어졌다. 이십 년이 흐른 뒤 테베에 원인 모를 역병이 돌자 델포이에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물었는데 테베 시민 가운데 한 명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파렴치한 불의에 격분한 오이디푸스는 그 천륜을 범한 범인을 찾아내기 위한 수사를 벌인 끝에 그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알고 절망하여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나라를 떠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하마르티아를 도덕적 또는 성격의 결함으로 보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는 정의감에 불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지나친 자신감과 과격한 성격 때문에 피할 수도 있었던 비극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지나친 자신감과 과격한 성격은 하나의 결함이며 이런 도덕적, 성격적 결함을 흔히 ‘비극적 결함’이라 부른다.
반면 하마르티아를 단순히 ‘판단 착오’나 ‘실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오이디푸스는 도덕이나 성격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판단 착오’ 때문에 불행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약 자신의 출생 비밀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길거리에서 실수로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판단 착오’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판단 착오는 인간인 주제에 자신의 알량한 지식만 믿고 분수 넘게 신들이 내린 운명에 맞서려는 오만함에서 온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오만을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 ?βρι?’라 했다. 오이디푸스의 실수는 오만함이 빚어낸 결과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마르티아는 우연한 ‘사고’와 ‘실수’의 중간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오이디푸스가 기구한 운명 때문에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이웃 나라의 양자로 입양된 것은 일종의 ‘사고’이고, 이를 모르고 오만한 마음에서 자신의 한정된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몰랐기에 저지른 ‘판단 착오’이며 ‘실수’다.
죄란 무엇인가?
기원전 3세기에는 하마르티아가 본격적으로 윤리적 실패나 타락을 나타내게 된다. 기원전 280년쯤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72인의 유다인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년?246년 통치)의 명령으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히브리어에서 죄를 뜻하는 낱말 ‘하타 ???????’를 ‘하마르티아’로 번역했다. 여기서 성경의 ‘죄, 원죄’의 뜻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의 ‘죄, 원죄’와 달리 그리스어에는 아직도 ‘잘못, 실수’라는 뜻이 남아 있다. 따라서 그리스어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죄는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오만에서 빚어진 ‘원죄’뿐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서 비롯된 ‘잘못’이나 ‘실수’라는 개념이 실리게 마련이다. 결국 죄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느님의 길에서 멀어지는 잘못을 저질러서 생겨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악을 만드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기에 악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죄악이 생겨난다. 죄악은 하느님의 선하심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과 믿음이 하느님의 선하심이란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생기는 것이 죄악이다.
선은 남에 대한 배려와 동정, 용서 그리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용기와 정직함에서 온다. 그런 생활은 행복하고 즐겁다. 그러나 악의와 질투, 탐욕에서 시작되는 악은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을 가져온다. 결코 공정하지 않은 시장을 가장 공평한 듯 꾸며 모든 것을 시장 원리대로 하자는 가진 자들의 횡포가 기승을 부린 지도 두 세대 가까이 된다. 약하고 어린, 못 가진 자들을 시장 원리에 맡기자는 가진 자들의 탐욕이 이 시대의 불행과 고통을 가져온다. 이런 불의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하마르티아’다.
[야곱의 우물, 2014년 2월호, 유재원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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