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길보아와 타보르
1. 그때 그 자리
카르멜 산자락의 이즈르엘 평야에서 요르단 강이 흐르는 동쪽을 향하면 북쪽으로 타보르 산, 남쪽으로 길보아 산을 만나게 된다. 타보르 산은 ‘높은’이라는 뜻의 ‘타보르 ??????’가 말해 주듯 해발 588미터로 평지에 우뚝 솟아있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기세 높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산들 가운데에서는 타보르 같은 자’(예레 46,18)라고 표현했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 언급될 정도로 전략적 요지였기에, 판관 드보라와 가나안 임금의 전쟁(판관 4,12-15)을 비롯, 유다인의 대로마 항쟁의 요새이기도 했다. 신약성경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주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가 있었던 자리가 타보르 산이라고 전해 온다.
타보르 산 남쪽의 길보아 산은 최고봉 500미터를 지닌 능선인데,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하고 자결한 자리다(1사무 31장). 다윗이 그와 요나탄을 기리며 부른 ‘활의 노래’의 한 구절은 이렇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그 비옥한 밭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마라. 거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더럽혀지고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2사무 1,21). ‘기름칠 없이’ 버려진 사울의 방패는 ‘기름부음받은이’였던 그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준다. 사울이 빗나가기 시작한 길목은 어디쯤이었을까?
2.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
사울은 사무엘이 주님의 뜻에 따라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1사무10,27), “사울 따위가 우리 임금이 될 수 있겠느냐?”(1사무 11,12)라는 분위기를 전해 준다. 사울에 대한 백성의 지지도가 낮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임금에게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통치권을 다지는 데 매우 중요했다. 사울은 암몬족에게 대승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왕으로 추대된다(1사무 11,15). 그런데 왕권의 기반을 ‘군사적 업적’에 두게 되면 전쟁은 갈수록 영토와 지배력의 확장을 위한 무리한 공격전이 되기 쉽다. 청동 무기뿐인 이스라엘이 철 제련 기술을 독점한 필리스티아인들의 강력한 수비대를 공격해서 벌어진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힘겨운 것이었다(1사무 13,1-14,46). 사울은 초조함을 드러내며 결국 제멋대로 주님께 제사를 지내는 잘못을 저지른다. 사무엘은 이를 꾸짖지만, 사울은 듣지 않는다.
그는 계속 전쟁을 하면서 용감하고 힘센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불러모은다(1사무 14,52).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그는 주님의 지시를 거슬러 전리품을 따로 챙겨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군사들이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아껴둔 것이지요. 그 밖의 것은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1사무 15,15ㄴ.20-21)
3.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는 사울
사울은 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까? 그가 하느님을 가리켜 ‘주 어르신의 하느님’(1사무 15,15.21)이라고 하는 데서 보여지듯, 하느님은 그에게 군사들보다 멀리 계신다.
사울에게 하느님은 ‘나의 주님’이 아니라, ‘예언자 사무엘의 하느님’이다. 그런 하느님을 사울은 온전히 따라갈 수가 없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다만 …’(1사무 15,20-21)이라거나, ‘하느님께 드리려고 …’라는 포장을 하는 것은 불완전한 따름, 조건부 순종이다. 그는 하느님보다 백성과 군사들을 더 의식했고 그들의 요구에 떠밀려 행동한다(1사무 15,24). 사람들 마음에 드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만, 제 백성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제발 체면을 세워주십시오.”(1사무 15,30ㄱ)라는 그의 마지막 간청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잔치 손님들 앞에서의 체면과 자신의 맹세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한 헤로데를 보는 듯 하다(마르 6,20.26).
4. 오늘 이 자리 - 그의 말을 들어라
길보아 산과 타보르 산의 갈림길은 ‘들음’에 있다. 믿음은 두 존재의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것과 그 말씀을 듣는 것은 신앙의 첫걸음이자 지속되는 관계성의 핵심이다. 타보르 산의 예수님께 내려온 하늘의 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는 말씀은 새로운 ‘쉐마 이스라엘!’이다.
히브리어에는 ‘순종하다’라는 말이 따로 없다. ‘듣다, 경청하다’가 이 의미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듣는 것은 곧 들은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함을 의미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그러한 결심과 결단이 일어나는 인간 내면의 자리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열린 마음이야말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인간이 태어나는 자리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하신 이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 알아듣고 마음에 간직하고 그리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빛나는 타보르 산 모습은 마지막 때의 완성을 보여준 일종의 예고편으로, 이제 산을 내려가 예루살렘의 십자가 죽음을 거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길보아 산이 타보르 산 가까이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는 들음이라는 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이고, 주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타보르 산의 변모는 길보아 산의 가르침을 잘 되새기는 이들을 위한 격려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우물, 2014년 4월호, 송미경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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