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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31: 십자가의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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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6 조회수4,029 추천수1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1) 십자가의 길 - 1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라틴어로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의 의미로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골고타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약 800m가량의 길, 즉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을 가리킨다. 최후 만찬 이후 체포되신 예수님은 카야파 대사제의 저택에서 신문받으신 다음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요한 18,28) 마태 27,1-2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

본시오 빌라도(Potius Pilatus)는 기원후 26-36년 동안 유다의 로마 총독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빌라도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루카 3,1; 마태 27,1-26 병행), 요세푸스(Josephus)와 타치투스(Tacitus)의 문헌으로만 알려졌다.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18권 63-64은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 빌라도가 언급된다. 이 본문은 “플라비우스의 증언(Testimonium Flavianum)”이라 불린다.

“그 때에 예수라는 현자가 나타났다. 굳이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유다인들과 많은 그리스인들을 끌어 들였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였다. 우리 가운데 앞선 이들의 고발에 의해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형에 단죄하였을 때, 먼저 그를 사랑하였던 이들은 그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흗날 그는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이 일들과 그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부류는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로마 역사가 타치투스는 110년의 『연대기』 15권 44,2에서 그리스도인에 의한 네로의 박해를 언급한다. “그래서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네로는 그들을 용의자로 만들어 매우 잔인하게 처벌하였다. 추행으로 인해 미움을 받은 이들을 군중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때 행정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이 가증할 미신은 잠시 억눌려 있다가 악의 발생지인 유다뿐 아니라 온갖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모여들고 퍼져 나가는 로마에도 다시 침범했다.”

1961년에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에 있는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 극장에서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명각(inscription)이 발견되었다. 명각이 새겨진 돌은 극장의 좌석으로 들어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서 계단의 층계참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발견될 당시 이미 돌의 왼쪽 부분이 심하게 깎인 상태였다. 이 명각에서 본시오 빌라도는 유다의 총독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카이사리아에서 발견된 명각은 예수님 시대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본시오 빌라도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 십자가 길의 역사

오늘날의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 구시가(Old City)의 동쪽 성벽에 있는 성 스테파노의 문으로부터 약 250m 떨어진 이슬람인 학교(Umariyya Boy’s School)에서 “주님 무덤 성당(the Holy Sepulchre)”까지 14처로 이루어져 있다. 제1처부터 제9처까지는 “주님 무덤 성당”에 이르는 길에 있고, 제10처부터 제14처까지는 이 성당 안에 위치한다. 과거 비잔틴 시대의 순례자들은 성 목요일 밤에 올리브 산에서 겟세마니와 성 스테파노의 문을 거쳐 골고타에 이르는 행렬을 하였다.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주님 무덤 성당”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었다. 오늘날의 비아 돌로로사처럼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가 있었던 곳에서 시작하여 골고타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과 각처가 확정된 것은 18세기이다. 14처 중에서 제1, 4, 5, 8처의 위치는 19세기에 정해졌다.


■ 제1처, 제2처와 관련된 복음서 본문

십자가의 길 중에서 예수님이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제1처와 제2처는 다음의 복음서 본문들과 관련이 있다.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태 27,15-26)

요한복음서 본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요한 19,1-3)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요한 19,5)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요한 19,12-16)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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