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엘리야에 관한 여러 단편(1열왕 17-19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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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7-21 | 조회수3,783 | 추천수1 | |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2)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 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열왕 17,16)
엘리야라는 이름은 ‘야훼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엘리야에 관한 여러 단편이 열왕기 상권 17-19장에 연속적으로 모아져 있다. 원래는 독립적인 전승단위로 민중 사이에 전해오다가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역사에 근거했지만 차차 전설로 변형되었다. 사실성이 부족하며, 구전을 통해 내려오면서 민중의 신앙과 상상으로 많이 채색되었다. 따라서 사실보도가 아니라 신앙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역사를 전한다고 보아야 한다.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 땅에 삼 년 동안 가뭄이 들었던 때 요르단 건너편 크릿 냇가에서 양식을 얻어먹는 기적을 체험했고(1열왕 17,2-7), 시돈 땅 사렙타의 어느 과부의 집에서 밀가루와 기름을 많게 했고(1열왕 17,8-16), 그의 아들을 소생시켰다(1열왕 17,17-24).
‘삼 년 가뭄’이라는 이야기의 틀(1열왕 17,1; 18,1)은 후기적인 첨가로 보인다. 열왕기 상권 17장 17-24절에 나오는 소생 이야기가 가뭄을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야에 관해 우리에게 있는 문헌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그 당시 대중에게 소개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의 출신을 언급하지 않고 그가 아합을 거슬러 출발했던 장소(1열왕 17,3)를 상세히 말하지 않는데, 이는 엘리야가 모든 사람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열왕기 상권 17장은 엘리야가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기적을 행하는 이야기다. 하느님은 팔레스티나 지방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지방의 풍산까지도 관장하시는 분임을 주장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사렙타의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로 음식을 만들어 엘리야 예언자를 대접했다. 그 덕분에 과부의 집에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 엘리사벳 노벨
설탕 조금으로도 음식 맛이 달게 되고 비누 조금으로도 내 몸이 깨끗이 되고 햇빛 조금 속에서도 살구 씨앗 눈트고 흙 조금 속에서도 한 떨기 꽃 피어나고 조금 남은 몽당연필로 책 한 권을 다 쓰고 조금 남은 양초로 내 기도 다 바치고 내 칭찬 조금으로 상한 갈대 일어서고 내 미소 조금으로 이웃 모두 환하고 모래알 같은 이 ‘조금’이 지구를 떠받치고 있네.
묵상주제
사렙타의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음식을 조금 주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과부는 하느님께 헌금을 조금 바쳤다. 그러나 그 조금이 얼마나 위력적인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조금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3) “주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듣고 그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하시자,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1열왕 17,22)
열왕기 상권 17장 17-24절에 나오는 집주인 여자의 아들을 소생시키는 이야기는 가뭄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삼 년 동안 계속된 가뭄 속에서 진행되는 열왕기 상권 17-19장 엘리야 이야기에서 쉽게 분리될 수 있으며 엘리야 이야기의 문학적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열왕기 상권 17장 17절의 ‘집주인 여자’를 앞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와 동일인으로 보기가 어렵고, 같은 이야기가 열왕기 하권 4장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열왕기 상권 17장 여주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정확히 말하면 부활이 아니라 소생(蘇生)이다. 그 아들은 다시 살아났지만 결국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원전 9세기 엘리야 시대에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직 없었다. 구약성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최초로 고백하는 구절은 기원전 2세기 다니엘서 12장과 마카베오기 하권 7장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어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 역시 헛된 것이 되고 만다(1코린 15,16 참조).
우리나라 역사에서 성삼문처럼 충절이 높은 이는 없을 것이다. 성삼문은 세조가 녹으로 준 쌀을 한 톨도 손대지 않았고, 세조가 위협하고 회유했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456년 성삼문은 새남터에서 참수 당했다. 새남터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구경을 나왔고, 저녁하늘에 북소리가 점점 울려 퍼졌다.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앞두고 성삼문이 느꼈을 마지막 심정을 오늘날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새남터 형장에서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시가 하나 있다. 성삼문의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라고 한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소리 울려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고개 돌려보니 해는 서산으로 저무는구나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황전 가는 곳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을꼬
이 시에는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고독과 절망이 배어나온다. 대쪽 같은 절개의 성삼문이라 하더라도 생을 마감하면서 느끼는 허무를 감당할 수 없었고, 의로움의 대가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1846년 바로 그 자리 새남터에서 똑같이 조선왕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분이 김대건 신부님이다. 북소리가 점점 울려 퍼지자 김대건 신부님은 모인 사람들에게 일장 훈화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일했다. 주님을 위해 일하던 내 목숨을 이제 마치려 한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된다.”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김대건 신부님은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도 나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천주교를 믿고 봉행하십시오.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러고 나서 긴장한 휘광이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내 목을 칼로 치기가 편하겠소? 내 준비는 끝났으니까 일을 시작하시오.”
묵상주제
성삼문과 김대건의 차이점을 잘 생각해 보자. 죽음을 앞두고 한 사람은 허무와 절망을 느꼈고, 다른 한 사람은 새 출발과 영생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의롭게 살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런 차이는 부활신앙에서 온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주님의 부활과 영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 정말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역경과 슬픔에서도 신앙 때문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부활신앙이 아니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감사와 기쁨과 위로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2014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4) “여러분은 주님의 계명을 저버렸고, 임금님은 바알을 따랐습니다.”(1열왕 18,18)
열왕기 상권 18장은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나라 안의 우상숭배를 척결하자 삼 년 동안 계속된 극심한 가뭄이 멎고 비가 내린 이야기를 전한다. 극심한 자연재해가 끝나고 비가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엘리야와 아합의 열린 마음이 있었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요?”
엘리야가 대답했다. “내가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아라, 임금님과 임금님 조상의 집안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계명을 저버렸고, 임금님은 바알을 따랐습니다.”(1열왕 18,16-18).
이처럼 엘리야는 임금의 잘못을 대놓고 지적하는 소신과 용기가 있는 예언자였다. 아합은 그의 말을 들었다.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가 아합을 사악한 임금으로 평가하지만, 아합은 엘리야 예언자의 직언을 들을 줄 아는 도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여 카르멜산에서 참된 하느님을 가리는 대결을 벌이도록 허락했다.
위(魏) 나라 문공이 하루는 신하들이 모인 자리서 이렇게 물었다. “나를 훌륭한 임금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신하가 한결같이 ‘여부가 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대답했지만 그 가운데 한 신하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훌륭한 임금이 못되십니다.” 문공이 화를 내며 물었다. “어째서인가?” “인물을 잘 못 보시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문공은 그 신하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무 말 안하고 있는 신하가 있었다. 그 마지막 신하에게 문공이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참으로 훌륭한 임금이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훌륭한 임금이 아니라면 아까처럼 옳은 말을 하는 신하가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문공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조금 전에 쫓아냈던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을 듣기 싫어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덕이 점점 더 쌓여 많은 사람을 포용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 정반대고, 나이가 들면 연륜이 쌓여 마음 씀씀이가 더 넉넉해질 것 같은데 사실은 그 정반대니 참 묘한 일이다.
나 역시 사제생활을 하면서 매일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니까 점점 도량이 넓어질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묵상주제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음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듯이, 귀에 쓴 말이 영혼에 좋은 법이다. 그리고 이웃 형제자매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뒤에서 쑥덕거리지 말고 직접 만나서 충고해야 한다. 만일 충고할 여건이 안 된다거나 충고할 용기가 없으면, 입을 꾹 다물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현명하고 애덕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다. [2014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5)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는 열왕기에 나오는 어떤 인물보다도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역사적인 가치를 의심할 만큼 우화적인 것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우화적’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화적인 이야기는 민중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엘리야와 엘리사는 민중의 희망으로서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엘리야에 관한 전승은 엘리사의 제자들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엘리야의 영적인 상속자라고 간주된 엘리사에 관한 전승의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수집되지 않았다.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는 북왕국에서 기원전 800년경 현재 우리가 아는 형태를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그 두 사람이 남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던 때였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가 수집 기록된 것은 엘리야의 자서전을 고정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을 일깨우고 엘리야 예언자의 투쟁에 의해 제기된 양심의 소리를 지속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엘리야 개인의 성격이나 특징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없는 것은 이런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엘리야는 북왕국 아합 임금 시대(기원전 875-853년)에 활동한 예언자다. 아합은 시돈의 임금 엣바알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 시돈과 동맹을 맺었다.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와 아세라의 신전을 건축했다(1열왕 16,31-33). 이것은 물론 이방나라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위해 필요한 외교적 관례의 하나였지만, 아합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페니키아의 잡신들을 함께 섬기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는 아합 임금과 정면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열왕기 상권 18장은 엘리야가 벌인 투쟁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850명과 대결하여 그들을 모두 학살했다. 이것은 엘리야가 홀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지지를 받았음을 뜻한다. 카르멜 산에서 엘리야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엘리야의 저항노선에 찬동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엘리야의 이런 행위는 일종의 반란이었다. 즉시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엘리야는 목숨을 구하려고 단신으로 도망쳤다.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과 결단을 촉구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의 풍산신(?産神) 바알을 섬기려 했고, 실제로 섬겼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아주 포기하거나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과 바알을 함께 섬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느님과 바알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며, 결단을 촉구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아닌 것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함께 섬기려 하는 것이 죄로 가는 길목이다. 죄는 하느님과 피조물을 함께 섬기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함께 누리려 한다. 이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죄를 짓는 사람의 특징이다
묵상주제
시련과 환란이 닥치더라도, 집안에 우환이 생기더라도, 사업이 뜻대로 안 되더라도 믿음이 흔들려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도 도와주실 수 없다. 도와주려고 가시면 그 사람의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느님이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엘리야 예언자의 불호령처럼 양다리를 걸쳐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샤를 드 푸코). [2014년 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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