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복음 이야기24: 대사제와 사제들 (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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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7-26 | 조회수4,670 | 추천수1 | |
[복음 이야기] (24) 대사제와 사제들 (상) 이스라엘 전통의 옹호자, 민족의 양심 역할
이스라엘 왕조시대 예루살렘 성전에는 2만여 명의 사제가 활동했다고 한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데 꼭 필요한 중개자요 제례의식의 관리자인 사제의 지위는 존중되고 존경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모세 시대에 탄생하고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사제의 역할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후 더욱 커졌다. 사제는 이스라엘 전통의 옹호자로서 민족의 살아있는 양심의 역할을 했고, 유다교는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배경과 제도가 되고 또한 존재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제 집안이라 해서 모두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제는 흠 없는 온전한 신체를 가진 자여야 했다. “너희 후손 대대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하느님에게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못한다. …몸에 흠이 있기 때문에 그는 휘장으로 오거나 제단으로 다가와서 나의 이 거룩한 곳들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레위 21,16-23). 이 율법에 따라 하스모네아 왕조의 히르카노스는 귀를 베인 당일로 대사제직을 내놓아야 했다.
사제로 선출되면 율법에 따라 세밀한 축성 예식을 거쳐 성별됐다. 성경은 사제 성별과 임직 예식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사제 임직자는 몸을 정결하게 물로 씻은 후 흰옷을 입고 머리에 성별 기름을 발랐다. 그런 다음 속죄 제물로 바칠 황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끌고 와 도살하기 전 안수를 하고 모두 번제물로 바쳤다. 주례 사제는 임직식에 쓸 두 번째 숫양의 피를 임직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른다. 그러면 임직자는 굳기름과 떼낸 양의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누룩 없는 과자 하나와 기름을 섞어 만든 빵 과자 하나, 부꾸미 하나를 놓고 그것을 손으로 흔들어 바친 후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연기로 봉헌했다. 이것이 구약의 사제서품 예식이다(레위 8장).
대사제의 축성 의식은 일반 사제의 성별의식보다 훨씬 장엄하고 화려했다. 대사제에게 부어지는 기름은 최상의 올리브 열매에서 짜낸 것으로 값비싼 향료를 섞어 극히 향기로웠다. 율법에 따른 희생제는 7일간 바쳐졌다.
대사제는 율법상 순결을 옹호하는 최고 책임자이므로 엄한 규율을 지켰고 과부나 이혼한 여인, 또 몸 파는 전력을 가진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죽은 짐승의 고기는 일체 먹을 수 없었고, 성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포도주를 마실 수 없었다. 그리고 시체를 멀리해야 했고, 수염은 한 오라기라도 깎아서는 안 됐다.
대사제의 옷은 화려했다. 일상복은 속옷을 입고 흰옷에 넓은 허리띠를 세 번 감고 삼각 모자를 쓴 간소한 차림새다. 성무를 집행할 때는 수놓아 뜬 속옷과 에폿, 가슴받이, 겉옷을 입고 두건과 띠를 했다. 가슴받이에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는 12개의 보석이 달려 있었다(탈출 39장 참조). 대축제 때에는 두건 대신 ‘주님(야훼)께 영광’이란 글이 새겨진 삼중 금관을 썼으며 대속죄일 때에는 흰옷만 입었다. 호화로운 이 대사제의 옷은 로마인에게 빼앗겨 안토니아 요새에 보관했다가 대축제일 때만 허가를 받아 입을 수 있었다.
대사제는 온갖 특권을 누렸지만, 지위가 낮은 사제들은 성전에서 생활할 수 없었고 희생으로 바친 짐승의 고기나 빵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율법에 따라 부정을 범해 죄지은 사제에게는 특별한 형벌이 가해졌고, 사제의 아내나 딸로서 품행이 바르지 않는 이는 엄한 채찍을 받았다.
모든 사제는 성소 안에서 맨발로 다녀야 했다. 성소 바닥은 정결례 목욕물이나 희생 제물의 피를 씻은 물로 항상 젖어 있어 이질과 같은 전염병에 늘 노출돼 있었다.
이스라엘의 사제들은 레위 지파에서 배출됐다. 그러나 최고 제관인 대사제의 직무는 모세의 형인 아론과 그 일족에게 맡겨졌다. 기원전 10세기 다윗왕 시절 아론의 후예로 엘아자르의 자손인 차독(공동번역 성경은 ‘사독’)이 대사제로 임명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위에 올린 후(1열왕 1,39) 그 일족은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 지위를 독차지했다. 이들은 차독(사독)의 후예들이라 해서 ‘사두가이’라 자칭하며 성전 대사제직을 누렸고, 레위인들은 이들의 복사 역할밖에 못 했다. 이처럼 소수 가문에서 사제들이 선출되면서 자기를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폐쇄적 특권의식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그들은 레위인들과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사두가이파는 혈통과 역사로 볼 때 차독의 후예라고 볼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마카베오 가문의 유다 독립전쟁 승리 후 비 차독 가문에 속한 하스모네아 왕조가 대사제직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차독 일족은 대사제직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사두가이파라는 말은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과 사상적으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했다는 것이다.
로마 지배를 받던 예수님 시대 대사제는 유다인의 눈에는 위엄이 넘치는 중대한 인물이었지만 로마인들에겐 한낱 정치적 이용 수단에 불과했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27일, 리길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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