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말씀 그루터기: 투명인간 요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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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7-29 | 조회수3,328 | 추천수1 | |
[말씀 그루터기] 투명인간 요셉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이 말씀에 대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근래에 어느 날 문득 이 구절을 듣고는, “어”하고 멈추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어딘가 다른 데서 많이 듣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마다 늘 하시는 말씀이지요. 아브라함(창세 15,1), 기드온(판관 6,23), 예레미야(예레 1,8) 등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꼭 먼저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루카 1,30). 소위 ‘소명사화’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 혹시, 천사가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마태오 복음서 1장은 요셉의 소명사화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되짚어 보면, 사실 그 장면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요셉이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모님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성모님은 두려워하실 법도 했지요.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났고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제 마음먹은 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파혼을 하면 마리아는 죽지 않습니다. 약혼한 여자는 이미 남편에게 매인 몸이지만, 약혼을 풀어주면 간음죄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혼한다고 해도 요셉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요셉이 혹시 분노하거나 배신감을 느꼈다면 몰라도, 두려워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무슨 일을 맡기려 하신 것이었을까요?
결국 요셉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에서 ‘요셉’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들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에는 요셉 성인의 말이 한 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 부분에만 나타나고, 그 외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의구심을 품고 서로 물을 때에만 요셉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마치 투명인간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요셉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도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하셨을 때에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다시 꿈에 천사가 나타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고 하였을 때에도,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마태 2,14)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요?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
한번 거꾸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요셉이 없었더라면? 글쎄요, 하느님 편에서는 아무 문제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기왕에 처녀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하고자 하셨다면, 요셉이 없었어야 그 일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더 놀라워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우리에게도 요셉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마태 1,2)로 시작하지만 “요셉은 예수를 낳고”가 아닌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라는 족보를 읽는 우리에게도 요셉은 결정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구실이 됩니다. 여기서 ‘구실’이라는 단어는 좀 부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습니다(루카 3,23).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아니라고 여길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요한 6,42).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일도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일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요셉은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요셉은 적어도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요셉은 빠져 나갈 구멍이 됩니다. 요셉이 없었더라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믿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없었더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의 상상과 주장들을 펼쳤을지 모릅니다. 말 없는 요셉은 그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다른 길로 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몫은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몫일 것입니다. 요셉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오해에 맞서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오해를 하도록, 그래서 성모님과 예수님이 살 수 있게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서 항상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라고 묘사되는 요셉의 역할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요셉의 역할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족보에서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되어 있지만, 요셉이 예수님을 아들로 받아들이셨다면 족보에는 아무 문제없이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 아니었다면 굳이 요셉의 족보를 길게 쓸 필요도 없고 처음부터 마리아의 족보를 썼겠지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대를 잇는 것, 족보는 중요한 문제였고 요셉은 순전히 법적으로만, 서류상으로만 예수님의 아버지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요셉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살다 보면,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전하지 않기 위해, 어떤 판단이나 결정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는 경우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입을 열어서 다 말해 버리면 나는 오해를 벗어날 수 있을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때,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님을 봅니다. 성가정의 가장이었던 요셉이 그랬듯이, 크든 작든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겪게 되는 일이지요. 그리고 이런 미묘한 상황 안에서, 때로는 요셉처럼 그저 “피해갈 구멍”이 되어 줄 사람도 필요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요셉은 두려웠을까요? 요셉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도,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는 쉽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오해를 뒤집어쓸 요셉을 마련하신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면, 요셉은 아무 말 없이 그 몫을 받아들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요셉들을 부르고 계시겠지요. 나자렛의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었듯이 두려움 속에서도 성모님과 예수님을, 아내와 어린 아들을 감싸는 요셉. 예수님은 그런 요셉의 족보를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땅끝까지 제82호, 2014년 7+8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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