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심리학이 본 요한복음 (2장 1절-25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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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성경주 | 작성일2014-08-07 | 조회수3,870 | 추천수1 | |
심리학이 본 요한복음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와 세례자 요한 -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유채, 1615~1620년경, 미술사 박물관, 빈, 오스트리아
말씀 / 카나의 혼인 잔치 <요한복음 2장 1~12절> 하였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말하였다.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내려가셨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 날 머무르지는 않으셨다.
때 이 때를 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원의 반경이 작았을 때는 예측할 수 있을 때이다. 원의 반경이 넓어지면 몸 만들기 같은 것처럼 예측하기 어렵지만 몇 개월 정도 하면 될거야하는 어떤 구분, 어느 시점 같은 것이다. 원의 크기가 더 커지면 예측이 어렵다. 원의 크기가 지구 공동체 같다고 한다. 파악하기가 어렵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다고 얘기하시는 것은 바깥 쪽에 있는 큰 원을 얘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원을 잡기 위해서 때를 잡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이 청원하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도와달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성모님이 요청하신 것을 기적을 보이시지 않고 거절로 끝났다면 예수님의 성격이 강박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강박적인 성격에 대해서 신앙생활 안에서 도덕성과 혼재가 되었을 때 열심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식별하기 어렵다.
-예수님이 보인 반응을 보면서 예수님의 성격 나는 강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자
식사가 어떻냐고 물어보면 밥이란 어떠한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밥을 보고 맛있다는 감정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기 안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마음이 건강한 것이다. 강박증에 걸린 많은 사람의 특징이 감정을 안 쓰려고 한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말을 할 때에 듣는 사람이 듣다가 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들으면서 집중이 안되고 짜증이 난다. 수도자들 중에서 특히 중세 때 수도원의 영향을 받아서 감정표현하는 것을 안 좋다는 수도자들이 가면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같이 사는 주위사람들이 피곤하다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답답함, 벽 같은 것이 있다. 지나치게 때를 가리는 사람은 그 마음 안에 적개심이 많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볼까 봐 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화투나 돈 내기 게임을 하라고 권한다. 돈 내기를 하면 자기 안에 깔려있는 온갖 감정이 다 올라온다. 자기 안의 감정을 드러내기 꺼리는 사람은 돈 내기 게임을 안 한다. 도덕성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데 도덕적으로 사는 것과는 별개이다.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무장하고 사는 사람은 일탈에 무력하다. 너무 지나치게 예의 바른 사람들이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자기 안의 욕구를 죄악시하고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잔소리가 많다. 왜 그런 강박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가, 어렸을 때 강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그렇다고 한다. 부모가 권위적이고 부모와 수직적인 관계일 때이다. 밥 먹을 때 잔소리 하는 아버지는 아들 입장에서는 병적인 존경심과 동시에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 자기는 그렇게 하기 쉬운가 하는 적개심이 생겨 부모와 같이 강박적인 성격이 된다. 사소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양심적이 된다.
-성모님의 성격- 하라고 하셨다. 심리적 건강이 좋았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믿을 이유가 없다.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많을 때 신을 찾게 된다 내가 기도해도 안 되는 일 중에서 시간이 중요하다. 시간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죽어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이다. 내가 한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2)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신뢰가 필요하다. 문제는 나와 같이 있는 사람들인 너를 어떻게 믿겠는가 이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예수님도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나는 내 자신이 믿음직한가, 사람들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대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반만 믿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를 못하는 마음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이 남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만 믿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이 믿음을 갖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불안에는 부유불안과 예기불안이 있다. 부유불안이란 불안한 찌끄러기들이 있다.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늘 불안한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런 불안들은 그냥 두고 사는 수 밖에 없다. 범불안장애자들이다
사람이 이런 불안들 때문에 힘들게 산다. 이 불안이란 것이 사람의 살을 깍아먹는 감정이다. 이런 불안한 생각때문에 내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 걱정만 하고 움직이지를 못하게 하고 죽일 수도 있는 독소적인 것이다. 적당한 불안은 있어야하지만 지나친 불안은 사람에게 있어 독이라고 얘기한다
-이런 불안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느님을 선택하는 이유도 그래서 그런 것이다. 하느님이 돌봐주실거야하는 생각만으로도 불안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중요하다. 성모님의 성격이 저돌적이었다. 건강한 마음인 것이다. 마리아가 당돌하고 당차다.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냥 그대로 다 맡겨버리는 기도생활을 하신 것이 엿보인다. 빵과 생선의 기적 때,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식구들 먹을 것만 챙겨갖고 있었는데 나눌 줄 모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눔을 보이셔서 모두 마음이 열려 나누어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두 먹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예수님이 빵을 나누어 주시려할 때 기도하셨다. 기도하시면서 그 다음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런 기도를 많이 하신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이 마더 데레사이다 캘커타에서 봉사하셨는데 전 세계 사람의 마음이 열리는 영향을 주었다 의탁하고 있느냐에 따르는 것이다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그것을 크게 하느냐 작게 하느냐에 집중하게 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하느님께 맡겨야 스트래스를 안 받고 자아도취나 자아팽창이 안 일어난다. 무리를 하게 되면 나중에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런데 식별을 잘 해야하는 이유가 남을 도와준 것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든데 도와주고 상대방이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의존증이라고 한다. 병적인 의존증 중에 희생자 콤플렉스가 있다.
괜찮은데 상대방이 감사해야 된다고 하면 의존증이 심하다고 얘기한다. 봉사를 많이 하는 분들이 이런 현상이 많은데 콤플렉스(complex)이다 내가 좋아서 선택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적당한 의존심은 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남에게 의존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한 반응을 하면 내 인생살이가 힘들어 진다. 하는 말에 끌려다니는 사람이다. 훈련을 해야 내가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길래 그렇게 남들에게 휘둘림을 당할까를 들여다보고 상처 받은 자기 마음과 대화를 해야한다. 그런 마음을 보면 어느 날인가 자기 마음이 열리고 힘이 생기는 때가 와서 더 이상은 못해준다고 거절하고 무리를 하지 않는 때가 온다. 생각의 패턴들이 고정되어 있어 뜯어고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도 해야한다. 그래야 지금보다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다. 내 안에서 그런 현상이 올라오면 굉장히 건강한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한다. 희생적 삶을 살게 되어 불행한 것이다.
-직면 - 말씀 / 성전을 정화하시다 <요한복음 2장 13~22절> (마태 21,12-17 ; 마르 11,15-17 ; 루카 19,45-48)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예수님의 성격, 흠집이 없어도 났다고 하면 봉헌을 못하게 해서 사야만했다. 그런데 그 가격이 비쌌다. 성전이 제사장들의 장사 속이었다. 로마화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는 성전 세를 낼 수 없다고해서 환전을 해야 되었는데 환전상들의 환율이 높았다. 그것을 제사장들도 나누어 먹었다. 이런 장사 속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계속되어 내려온 관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격이 대단하신 예수님이 성전에서 둘러엎었다는 얘기이다
이 조직체가 건강할 때에는 피어나는데 병적인 조직체가 병적일 때에는 조직체를 지배하는 사람이나 지배를 당하는 사람이나 병들어간다. 병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인생은 이런 거라는 깨달음을 얻기는 어렵다. 사람이 받는 질문 중에 제일 어려운 것이 너 행복하니? 라고 한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당혹스럽다고 한다. 내 행복을 너가 결정한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행복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내게 준 행복이기 때문에 상대가 그런 행복감을 걷어가 버리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매달려 사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준 행복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늘 불평을 한다. 내가 상대방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잘 못 본다. 놓아주면 되는데 내가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너라면 이 정도는 해주어야 돼 하는 should be com.때문이다.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콤플렉스이다. 외쪽 기준에 자신을 합법적으로 맞추며 살다보면 자율적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게된다고 한다. 자기 입맛을 모르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을 사는 맛 중에 하나가 먹는 맛인데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접어버리고 먹는 것도 자식에게도 맞추어 가다보면 자신을 상실한다. 나중에 자신을 보면 화가 난다. 이것은 콤플렉스이다. 이 콤플렉스는 교조적이고 경직된 사회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should be complex는 자기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괴로움을 준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만성무기력증을 갖고 있다. 남들도 이렇게 살지 않나요,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한발자국도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면 답답하고 짜증이 일어난다. 사람이 갖고 있는 관심에는 주관심사와 부관심사가 있다. 관심이란 내가 갖고 있는 욕구(desire)와 관련이 있다. 하고 싶은, 갖고 싶은 욕구들은 본능과는 다르다. 내가 갖고 있는 욕구가 하나가 해소되면 심리적인 조건에 따라 다른 욕구가 올라오는데 1차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주관심사라고 한다. 주관심사가 해결되면 뒤에 있는 부관심사가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주관심사로 돌아간다. 주관심사와 부관심사가 원활하게 순환이 되는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순환이 잘 되게 하면 심리적으로 건강하다. 병들게 하는 것이다. 해소방법이 술이 되어 중독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내 인생살이가 남의 옷을 입고 사는 것 같을 때이다 사람, 상대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문제를 인정을 안한다. 자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자기기만이고 폭력적이다. 자기 문제를 자기가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해도 접수가 되어야하는 존재자체를 인정해주면 편안함을 느낀다. 2.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 과거천착은 불편하다. 다양한 단체가 생겨야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자생적으로 생겼다가 안 되면 소멸되고 무엇인가 생겨날 수 있는 터가 되어야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고 열려야 한다. 열린 생각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 / 모든 사람을 아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2,23~25>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 기다렸다. 메시아(Messiah)는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야곱의 아들들이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 아래에서 왕국 재건이 꿈이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어서 이스라엘 안에서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셨다. 내가 누구인지 자신 있게 설명하실 수 있는 분 계세요? 물었을 때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왜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자의식(self)이다
1. 자의식(self), 즉 깨달음(awareness)이라고 한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을 정체성 혼란이라 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 내가 누구지 하는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을 자기 정체성 혼란이라 하고 자기 자의식이 약하다고 한다. 이것을 정신적 에이즈(Aids)라고 한다.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의식이 약한 사람들이다. 자의식이 약한 분들이 다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에 빠져있다.
것이었다 바라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소리치거나 뭔가 내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강론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약한 부분을 건드려 증폭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외쳐대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띄워서 마치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만들어 일어나지 않는 부분을 건드려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경계하셨던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다.
*조증무드(manic mood)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체면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을 갖게 된다. 집단적으로 있을 때는 자기 자의식이 약해지거나 집단적인 분위기에 따라가게 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욕구부분을 건드려 조증무드를 일으켰다.조증무드는 우울증과 반대이다. 팽창된 자신감과 같다. 능력이 안 되는데 사업을 자꾸 벌이는 남편 같은 예이다. 건강한 사람은 손익계산을 하고 뛰어든다. 기분이 늘 들떠있고 아이디어가 많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은 뿌리 없는 부평초와 같다고 한다. 조증인 종교지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자기 안에 있는 원래 숨겨진 감정이 돈이라는 미끼에 걸려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돈을 못 꾸어주는 것은 못 믿고 있는 것이다. 구름기둥 보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 손에 잡히고 얻은 것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극히 드믄데 믿음에 대해 강조하는 것, 믿음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선동적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뜻대로 안될 때 좌절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조증으로 가는 경우가 조증무드이다.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낫다. 무모하게 무엇인가를 해서 현실적인 손실을 많이 본다. 중세 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돌봐주신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군대에서의 하면 된다는 구호처럼 미루어 부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로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의:도반홍성남신부님(작성자 박용귀님) 편집: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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