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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한복음 해설 (2장 1절-2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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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성경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07 조회수14,672 추천수1

복음사가 1625-30년경

야콥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

캔버스에 유채, 134 x 11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성화 해설>

마태오, 마르코, 루카 그리고 요한(중앙의 흰 망토를 두름)의 복음사가는 중세부터 널리 그려진 주제로, 일반적으로는 각자 복음 기록에 전념하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표현을 추구한 플랑드르 바로크의 요르단스가 그린 모습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모습이 아닌 친근한 모습이다. 깊게 파인 주름과, 붉게 상기된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와 잔뜩 인상 쓴 모습은 성인이기 이전에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다. 이들은 놀라운 성령의 힘으로 천상의 메시지를 조심스레 받아 적고 있다(박혜원 소피아). / 자료 : 심재엽파스칼


제 1권. 표징의 책

 

제2부. 예수의 첫번째 표징과 그를 믿는 이들


     가나의 혼인잔치(2,1-12)

     성전정화의 표징(2,13-25)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세례자요한의 마지막 증언(3,22-30)

     계시자이신 예수(3,31-36)

     생명수-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1-4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43-54)

  

      


<2부의 전체적인 이야기>


2-4장은 ‘가나’에서 시작하여(2,1) ‘가나’의 이야기로 마쳐진다(4,46). 그리고 2개의 이야기와 3개의 담화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이야기(행적)  :  2,1-11(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

                      2,13-22(성전 정화 이야기)

3개의 만남과 담화문 : 3,1-21(니고데모와의 대화)

                      4,1-26(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4,46-54(고관과의 대화)


이들 각자는 장차 믿음을 얻게 되는 각 계층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물과 성령’, ‘물’, ‘생명’이라는 주제들이 다루어지며, 예수께서 바로 그것을 주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이 단원의 내용상의 구조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새 성전, 새로 남새로운 예배새 삶의 메시지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변화’를 의미한다새로움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대인들, 반면에 넘쳐나는 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혼인잔치와 커다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니고데모로 묘사된 정통 유대인들은, 예수를 단지 기적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생(랍비)으로 인식하지만, 예수의 신성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단적이며 분리된 지역 사람 사마리아인들은 육화한 말씀인 예수와 만난 후에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한다(4,1-12).

이방인들의 대표자로 나타나는 고관이 즉시 예수의 말씀을 믿어 완전한 믿음의 표본으로 나타난다.(4,46이하)


이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종교와 예배라는 공통주제 및 거듭 나타나는 물과 혼인이라는 표상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종교와 예배라는 주제는 정결예식에 쓰이는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로 시작된다(2,6). 이 물항아리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전 세계 거의 모든 종교들이 수행하는 가장 보편적인 종교의식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물항아리가 예수께서 최고급 포도주로 채우시기 전에는 비어 있었다고 요한은 말한다. 즉 알맹이가 없고 비어있는 예배인 것이다.

종교와 예배라는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 사건에 의해 더 발전된다. 예루살렘 성전은 원래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던 장소이다. 그런데 이 예배도 끝나고 허물어지며 새 성전으로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2,21).


요한은 끝으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를 우리에게 제시한다(4,20이하). 사마리아인들의 종교는 예수께서 오시기 몇세기 이전에 사마리아를 정복했던 이교도 제국에 의해 전파된 종교와 혼합된 종교이다. 그런데 이 종교와 예배 또한 그리스도교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세상 것을 따라 사는 삶 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예수와 진정으로 만남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새로움으로 대체된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묵시록21,1) 예수는 우리에게 이처럼 새로움으로 오신 분이



요한복음 - “때”(시간)의 신학

 

성서에서 “때”(시간)는 히브리어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구분된다. 크로노스는 1초 1초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이다. 매일 한 번씩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고, 매년 한 번씩 봄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동식물이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시간이다. 이 속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이 웃고 울며, 분내고 기뻐하며, 번민하고 수고하며 살아간다.

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의미, 때라는 신학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어떤 일이 수행되기 위한 시간 또는 특정한 시간을 가리킨다. 특히 하느님의 활동이 전개되고 그 분의 계획이 실현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와 함께 도래하는 메시아의 “때”는 하느님 나라가 선포되는 때(2,14)이며, 특히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실 예수의 수난과 영광의 때이다.

이 때는 그 누구도 모르는 때이고 하느님께서 혼자 정하신 때이다.("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13,32)) 예수께서는 이 때를 “나의 때”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때를 바꿀 수 없으며, 당신의 어머니가 표징을 청하셨어도,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가 아직 안되었음을 명확히 하신다.

요한복음사가는 “예수의 때”에 대하여 계속 언급하면서 이 사실을 일반화시킨다.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이상 그분을 붙잡으려는 시도나 그분에게 돌을 던지려는 행위(7,30; 8,20)는 헛된 것이다. 인간의 여러 가지 계획은 하느님이 정하신 결정적인 때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 성부께로 가실 때”(13,1)가 되면, 예수께서는 대사제로서 스스로 죽음에로 향하신다(14,29-30).

 

예수의 때에 대한 요한복음의 성서본문들....

 

7,30 :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8,20 :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12,23 :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12,27 :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           (때)를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  (때)을 겪으러 온 것이다.”

13,1 : 과월절을.....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17,1 :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2,1-12)

 성전정화의 표징(2,13-25)


자료 : 테오필로신부님 / 제대 뒤에는 여섯개의 물 항아리로 장식되어 있다...


1.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징(2,1-12) 

 

<성경본문>


 1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2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3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4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6  유다인들에게는 정결 예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 예식에 쓰이는 두세 동이들이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7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8  예수께서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 하셨다. 하인들이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9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물을 떠간 그 하인들은 그 술을 어디에서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잔치 맡은 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술맛을 보고 나서 신랑을 불러

10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 하고 감탄하였다.

11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12  이 일이 있은 뒤에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에 내려 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머물러 계시지는 않았다.



<이해를 돕는 글>


요한복음사가는 자신이 쓴 복음서를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징(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20, 39)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표징’의 성격을 갖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징(기적)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총 일곱 개의 표징만이 보도되고 있다.(2,1-11; 4,46-54; 5,2-9; 6,1-15.16-21; 9,1-12; 11,1-44) 그런데 가나의 표징 이야기는 그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리고 첫 번째로 소개되는 표징(기적)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기적’이란 말은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사건을 의미한다. 기적은 단지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표징”은 ‘기적’이라는 말보다 더 심오한 신학적인 용어이다. 즉 예수의 기적을 가리키는 요한복음서의 특유한 용어이다. “표징”이라는 말은 어떠한 행위가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무엇을 가리키거나 나타내 보인다.


“표징”은 예수의 신적인 행위로 예수와 그를 파견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로 인하여 믿음이 야기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성전정화가 표징이 되는 이유는, 단지 성전을 정화한 행위를 뛰어넘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행위가 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다....”(2,19) 여기에서 성전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며, 이 이야기는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나의 포도주의 기적 역시 단지 포도주를 만드신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작된 새로움, 새로운 예배, 새로운 삶이 이 표징의 목적인 것이다.


표징은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을 행한 예수께 중점을 둔 특별한 용어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표징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에 있다. 그리고 이 일이 있기까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나는 첫 제자들에게 약속한 “더 큰 일”(1,50-51)이 실제로 이루어져 그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1,41), 모세와 예언자들이 예언한 분(1,45), 이스라엘의 왕(1,49), 하느님의 아들(1,49)로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자기 계시가 “표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7개의 표징중에서 그 첫 번째, 가나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주석>


[1-2절]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되던 날...” 즉, 바로 앞에 나오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신 후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 말한다. 이는 실제로 사흘째 되는 날 이라기 보다는, 문맥을 연결시켜 주기 위한 복음사가의 서술 표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1,29.35.43참조). 상징적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하느님의 도움이 이루어진 날”이라고 말해 볼 수는 있겠다. 왜냐하면 "3"이라는 숫자는 완전이나 완성을 뜻하고 신적인 것과 관련을 맺고 있지 때문이며, 예수의 “시간‘(4절)은 성부의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서(17,1)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11절).

그러므로 이 사흘째 되는 날이란 예수의 부활의 신비를 암시하는 것이다. 바로 이어 나오는 성전 정화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3일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시며,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다.

그밖에도 오래된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란 어구는 예수의 부활과 관계가 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가나의 표징은 죽음과 부활로 들어 높여지는 예수의 “때”를 예고하고 있다.


 

로마의 성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발견 된 

성모 마리아의 얼굴 (5세기)

                  

 5세기의 성모신심을 엿볼 수 있다.


“이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복음사가는 예수의 어머니께서 참석한 이유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면 친척이었거나 친구였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마리아의 역할 때문에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는 “십자가상 죽음의 장면”에서도 또다시 등장한다(19,25-27).

히브리 백성들은 혼인잔치를 장엄하게 치루었다. 일반적으로 잔치는 일주일 간 계속되었다. 야곱의 혼인의 경우 일주일간의 잔치를 얘기하고(창세29,27-28), 반면 토비아의 혼인잔치의 경우 2주일이나 계속되었다(토비8,20).


[3절]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여기서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섬세함과 천성의 동정심을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의 이 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성서신학자들 사이에 예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기적을 청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들이 그런 기적을 하리라 상상하지 못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기적을 부탁한 말씀이 아니다. 다만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알리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져 곤란에 처한 잔치집의 상황을 모른체 하지 않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난감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에게 동참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영성신학자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께 청하면 무엇인가 표징을 보여주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의 성령 잉태와, 이어지는 신비스러운 기억들을 마음속에 새기며(루가3,51) 그의 성장을 지켜본 마리아는, 장성한 아들이 그의 추종자들인 제자들을 거느리고 사람들의 모임에 처음 나타났을 때 어머니는 감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들의 변화는 어머니가 제일 잘 안다. 더구나 이해 못할 사건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는 신비스런 체험이 이미 있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욱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 모두가 각각 의미 있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 방향에서 각기 묵상해보는 것은 모두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자료 : 테오필로신부님 / “포도주가 없구나.”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흥겨운 혼인잔치에서 술이 떨어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예수님과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데 대한 책임이 없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잔치집 주인의 사정이며 예수님과 성모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 사실을 내 일처럼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함께 걱정하고 책임을 지고자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웃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살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치가 어떻게 되든 경제가 어떻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일에 공동의 책임을 지는 데 있다. 미개한 사회일수록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반면 성숙한 사회일수록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마리아는 잔치집 주인에게 이것도 잔치라고 준비해놓고 사람들을 초대했느냐 하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난감해하는 잔치집의 처지를 함께 걱정해주고 공동의 책임을 지려 한다.

신앙인들의 가정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책임지고, 아내가 남편을 책임지며 부부가 함께 자녀들을 책임져야 한다. 가정의 문제점을 서로 미루거나 책임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모든 신앙인이 교회 발전에 함께 책임을 지고 교회를 짊어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또한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이들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암담한 이 한국사회를 책임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한다.


[4절] “여인(부인)이여,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예수의 이 말은 꾸지람의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참견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말씀이다. 공동번역은 ‘어머니’라고 의역했지만 원문에서는 ‘여인’이라는 말이다.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면서 셈족 계통의 표현 방식으로 반문하는 것은 어떤 거리감을 두는 표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왜 아들이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는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예수께서 어머니를 부르실 때도 이 말을 쓰신다(19,26). 이 ‘여인’이라는 말은 창세기 3장을 기억하게 하며,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만민의 어머니), 만민의 새로운 어머니로 소개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직역하면, “무엇이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상관 있습니까?)”인데, 두 사람 사이 관점의 차이나 관계에서 거리가 있음을 뜻한다. 이제 예수께서는 공생활의 첫 표징을 행하시는 시점에서 성모님과의 혈육관계로부터 간격을 두신다. 물론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어머니로부터의 일종의 독립을 선언하신다. 공관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친척들 앞에서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신다(마르3,31이하; 마태12,46이하; 루가8,19이하; 2,48-49). 주님의 “때”는 혈육의 정으로도 변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학자 바누아(A.Vanhoye)는 이 대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공관복음서는 친척들에게 취하신 예수의 태도에 대해서는 표현하였으나 마리아의 반응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반면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어머니가 지난 놀라운 유연성을 드러내며 의문을 풀어준다. 그분은 예수의 단호한 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예수께 완전히 순종으로 인도한다. 이것으로 그분은 육에 의한 예수의 어머니 역할에서 믿는 이들의 영적 어머니의 역할로 옮겨간다.”


“아직 제 때(시간)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때(시간)”이 곧 성부께로 귀환하는 예수의 죽음과 직결된 “때”를 전형적으로 가리킨다. 즉 그 “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의 영광과 함께 성부의 영광이 계시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 자신이 성부의 뜻을 따르며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알려주고자 했다고 하겠다. 즉,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를 혈육의 관계를 뛰어넘어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보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역할로 인하여 가나에서 첫 번째 표징을 보임으로서 예수의 때가 이미 온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빋게 되었다.”(11절)


[5절]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마리아는 마치 예수의 말을 잘 알아차린 듯이 예수의 뜻에 따르도록 시중꾼들에게 말한다. 즉, 마리아는 뒷전으로 물러나 자기 아들을 신뢰하며 지지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의 뜻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며 예수의 뜻이 없으면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다. 그러므로 오직 전권을 예수께 맡겨드린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시면서 예수께 순종하라고 하신다. 성모님이 나서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신다. 그리고 믿고 기다린다. 이것이 성모님께 배울 깊은 신심이다.

사실상 마리아의 이 말은 파라오가 에집트인들에게 말한 내용(창세 41,55)과 병행을 이른다. 파라오도 자기 신하인 요셉에게 모든 전권을 맡기고 물러선다.


당시 정결례에 쓰이던 돌항아리

 

[6절] “한 동이”(원어로 메트레테스)는 대략 40리터에 해당한다. 두세동이면 80리터 내지 120리터이고, 우리가 많이 쓰는 페트병의 50-80개 정도 양이다.


[7-8절]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우시오”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의 뜻을 존중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런데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었다. 누가 물이 없다고 했나? 포도주를 원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정 반대로 물을 채우는 일이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이 따라주시기를 원한다.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청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이사55,8)” 성모님도 “그가 시키는 대로”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법대로 하느님이 하신다. 우리는 포도주가 없다면 포도주가 당장에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보다 능하시다.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이나 고집을 버리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인은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 물을 채우고 잔치주관자에게 가져간다. 잔치 주관자는 잔치 식탁의 진행을 조절하며 음식이나 음료를 제일 처음 맛을 본다.


[9절] 예수께서 주시는 선물은 양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최고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 자체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잔치 주관자에 의해서 그 기적이 일어났음이 확실시되고 시중꾼들은 그 기적의 증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하인은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기 때문에 기적을 목격한다. 그러나 잔치주관자는 결과만 알았지 원인은 모른다.

기적은 예수께서 일으키셨는데 엉뚱하게도 잔치 주관자는 포도주 맛을 보고는 찬사를 하기 위해 신랑을 부른다.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포도주를.....”



[10절] 사람들이 포도주 맛을 보고는 감탄을 한다.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어놓고 취하면 덜 좋은 것을 내어놓는 법인데 더 좋은 포도주가 나왔으니 감탄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잘하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한결같지 못하다. 부부도 처음에는 서로 사랑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덜 사랑한다. 무슨 일을 할 때에도 처음에는 잘하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정성이 없어진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면 나중에도 더 좋은 것을 주신다. 신앙인들의 남은 생애를 은총이 충만한 더 좋은 삶으로 인도해 주신다. 물처럼 아무 맛없는 삶이 아니라 향기롭고 맛좋은 포도주와 같은 삶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11절] 가나에서 일어난 예수의 첫번째 기적의 의미와 결과를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이다. 즉, 이 기적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표징”이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지만, 오로지 믿음의 눈으로서 그 “표징”을 보는 자에 한해서라는 점이다. 따라서 “표징”은 예수의 자기 계시의 수단이요, 그 “표징”의 의미는 믿는 자에게만 전달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2] 문맥상으로는  “가나의 기적”(2,1-11)이야기와 “예수의 성전 정화”(2,13-22)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구절이다. 내용상으로는 가족이나 고향 땅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계시를 지속적으로 펼치고자 하는 예수의 모습이 시사된 구절이다(“거기에서 여러날 머물러 계시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은 공관복음서의 보도처럼(마르 3,21.31-32; 6,4) 넓은 의미로 예수와 가까운 친척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7,3참조).

 


<묵상하기>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핵심은, 예수께서 인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종교들과 갖가지 예배 방식들을 어떻게 대체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표징이 혼인잔치라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최고 품질의 포도주를 풍부하게 마련해주심으로써 곤란한 처지에서 구해 주시는 결혼식이라는 점이다.

독신의 노총각인 예수는 왜 첫 기적을 혼인잔치에서 행했을까? 교회는 가나의 기적을 남녀가 맺어지는 혼인성사의 축복으로도 이해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복음서의 첫 기적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구약성서에서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이라는 비유는 자주 사용되었다(호세아2,7이하). 이 표상은 메시아 시대에까지 연장되며 신약성서에서도 등장한다(묵시록19,6-7).

‘술’을 마시면 사람의 마음은 흥겨워진다. 술 자체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입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마태15,11.19-20)


술은 과용하지 않으면 인생을 여유 있고 넉넉하고 풍요롭게 만들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음식이다. 성서에서 술은 상징적으로 마지막 때를 묘사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범죄한 백성들을 벌하시러 오셔서 그들로부터 술을 빼앗으신다(신명28,30). 또한 파괴의 날로 간주되는 주님의 날에 이스라엘 가문이 자기네 차지가 되지 못하고 거기에서 빚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니 포도원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날이 될 것이다(아모스5,17).


또 한편 술이 넘치게 풍성한 것은 행복과 구원 약속이 된다. 아모스가 본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명상은 산에서 햇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무르익은 곡식이 물결치는(9,13) 땅을 본다. 이사야는 만백성을 위해서 시온 산 위에서 차려질 ‘포도주의 잔치’를 선포한다(25,6). 메시아 시대의 포도주의 상징은 성체성사의 포도주에서 계속되고, 살아 있는 성체성사가 교회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가나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포도주의 기적이요, 잔치맡은 이가 감탄한 것처럼 지금까지 숨겨놓은 좋은 술이요, 종말에 쏟아질 풍성한 술이다.



예수께서는 빈 물 항아리들이 물로 채워져 결국 가장 좋은 포도주를 담고 있게 되는 것처럼, 세상 종교들을 충만히 채우시고 변형시키시는 분이다. 질 좋은 포도주가 혼인잔치에 온 목마른 손님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듯이, 예수께서는 모든 종교, 모든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된다.

우리의 인생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빈 항아리였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질 좋은 포도주로 채워짐으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은 새로움, 새로운 예배, 새로운 인생, 즉 구원의 복된 삶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어둠(1,5)”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의 인생에 참된 의미와 참된 “빛”(1,9)으로 다가오신 분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가나에서 예수의 어머니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요한복음에서는 특이하게도 예수의 공생활 초의 첫 번째 기적의 순간과, 최고의 기적이 될 마지막 십자가 곁에 어머니 마리아를 등장한다. 이는 요한복음이 담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아닐 수 없다.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술이 없다는 말은 물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향기롭고 맛있는 술이 아니라 아무런 맛도 없고 색깔도 없는 물이다. 진정으로 향기로운 새 포도주는 예수 자신이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 유다이즘은 그리스도를 수용할 능력이 없다. “술이 없다”는 마리아의 말은 구약으로는 부족하다는 영신적인 요구에서 나온 말이다. 이스라엘의 충실한 “남은 자”들은 새롭게 열릴 하느님의 구원을 고대하고 있다. 십자가 발치에 서 계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부른다. 이 말은 마리아의 종말론적 역할을 의미한다. 교회(Ecclesia)라는 말은 여성형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어머니”(자모)이신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는 예수안에 ‘남은 자’들이며 만만을 포용하여 예수께로 인도해야 하는 어머니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말을 받아들이시고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행하신다. 이처럼 초월자이시고 창조주이신 분께서 비천하고 연약한 인간의 중재를 받아들이신다. 성모 마리아는 이렇게 예수의 공생활 초부터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19,26) 이것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반대자들의 공격을 무릅쓰고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또 협조자로 공경하고 있는 이유이다.

 


2. 성전정화의 표징(2,13-25)

[출처] 통제할 수 없는 분노-인크레더블 헐크 |작성자 thankee2. 성전정화의 표징(2,13-22)


<성경본문>


13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와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14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꾸짖으셨다.

17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18  그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이해를 돕는 글>


요한 복음사가는 이 성전 정화를 "가나의 기적“처럼(2,11) 예수의 자기 계시로(21절) 설명하면서 예수를 믿는 제자들(22절)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18절)을 대조시킨다. 특히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표징“을 요구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그들의 몰이해와 불신이 폭로된 셈이다(6,30.36참조). 이렇게 예수의 적수들이 공생활 조기부터 등장됨으로써 앞으로 펼쳐질 예수의 운명을 예감케 해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을 정화하신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공생활 초에 가나에서 첫 기적을 일으키신 후 일어난 일로 복음서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유다이즘의 완성으로 선포하신 것은 공생활 처음부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종교 제도들은 개혁되고 정화될 대상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즉 유다이즘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1-4장 전체에 걸쳐 유다이즘이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제가 표현되어 있다.

일찍이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희망으로서 알아보고 고백한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시대의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믿게 된다. 뒤 이어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 즉 성전정화이야기와 유다이즘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새로움”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성전정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표징을 내포하고 있다. 가나의 표징과 성전정화의 표징 사이에 닮은 점은 이야기 끝에 “제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가나의 표징은 갈릴레아의 가나에서 이루어진 표징이지만, 성전정화의 표징은 더 이상 갈릴레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진 표징이다. 그러므로 이 두 표징은 일종의 완성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두 표징은 정통 팔레스티나를 형성하는 두 구역 갈릴레아와 남쪽의 유다 예루살렘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주석>


[13절] “과월절(해방절)” :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가 공생활 동안 세 번이나 과월절을 보낸 것으로 말한다(2,13; 6,4; 11,55). 이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3년 가까이 공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과월절”이란 표현은 “유대인들의 율법”(8,17; 10,34)처럼 유대인들과의 거리감을 시사한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적수로 등장한다(참조: 18절 각주; 1,31각주).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도시가 해발 760미터 가량 되고갈릴래아 호수는 해저 200미터  가량 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향해 갈 때는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 아마도 예수는 과월절을 맞이하여 순례차 예루살렘으로 간 듯하다.

     

[14절] 성전 마당 가운데서도 외부에 속한 구역 이른바 “이방인들의 마당”에서는 여러 장사꾼과 환전상들이 특히 축제일을 앞두고는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순례자들은 성전에 바칠 제물(소,양,비둘기)과 성전세를 마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성전세는 고대 시리아 화폐로만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시중에서는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 제국의 화폐만을 사용했다. 따라서 성전에서는 환전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15절] 이 성전의 상점들은 대사제 가야파가 영리 목적으로 연 상점들이었다. 환전상들과 제물로 쓸 동물들을 파는 상점들은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한 것이다. 종교와 상거래가 손을 잡은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으로 가셨을 때 상인들이 순례객들의 돈을 긁어내느라고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채찍을 휘둘러 그들을 내쫒으시며 불같이 화를 내시는데, 당연히 엄청난 소요가 일어난다. 이는 돈에 눈이 먼 당시 지도자들에게 매우 도전적인인 사건이었다.


[16절] 공관복음에서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마르11,17; 마태21,13; 루가19,46)고 더 강한 표현을 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히 신학적 무게가 있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신다. 따라서 성전 정화를 예수의 메시아적인 행위로도 이해할 수 있다(루가 14,21참조).


[17절] 제자들은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시편 69,10의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했다는 복음사가의 설명이다. “하느님의 집”에 대한 예수의 열정이 결국 죽음의 동기가 된다.

“나를 불사르리이다” - 예수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셨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열정이 예수를 사로잡은 것이다.



[18절] “유대인들”은 제자들과는 달리(17절, 22절) 예수가 성전에서 행한 일에 대해 일종의 심문형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래서 자기네들이 인정할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이 “표징”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2,11참조)과는 차원이 다른 일종의 신적 증거를 뜻한다. 한마디로 믿지 않는 자들이 요구하는 “표징”인 것이다(참조: 6,30; 마르 8,11-12병행구).


[19절] 예수는 “유대인들”이 요구한 표징과는 전혀 다른 표징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대답은 어떤 오해를 야기 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계시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런 표징을 거부하신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마태12,39)”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사흘 안에”는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말씀이다.


[20절] “유대인들”은 예수의 계시 말씀 가운데 언급된 “이 성전”을 당시 세워져 있던 성전 건물로 이해하고서 예수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46년”은 성전이 건립되기 시작한 해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경부터 성전 신축 공사를 시작했으니, 46년 뒤라면 서기 27-28년경, 곧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1절] 예수는 자신의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했다고 복음사가는 설명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오해도 지적한다. 복음사가의 이 설명으로 인해 특히 예수의 계시 말씀(19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몸을 “허물도록”(죽음으로) 자유롭게 내주지만, “사흘 안에 다시 세운다”(부활한다)는 것이다. 이는 16절과 연결되어 그 의미를 뚜렷이 드러낸다.

         16절   “내 아버지의 집”   -  성전

         21절   “당신의 몸”        -  성전


그 뿐 아니라 예수의 “몸”이 “성전”, 곧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장소(1,51참조)이기 때문에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4,23).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요(4,21-22),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며(1,14),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참다운 성전이 된다(7,37-39; 19,34).


[22절] 이 마지막 대목은 17절과 병행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야 성전의 표징에 대한 예수의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묵상하기>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2,17b)

성전은 하느님 백성의 진정한 예배의 장소이며 하느님의 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성전 중심의 역사이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것처럼, 에집트에서 탈출한 후에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계약의 궤에 넣어 성막에 안치하였다. 이 계약의 궤는 케루핌(아홉 천사들)들 사이에 볼 수 없으신 하느님께서 앉아 계시는 야훼의 자리였다.

야훼께서는 몸소 지성소를 건축하도록 명하시고 그 설계 도면까지 지시하셨다.(출애25,8-9)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이 성막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백성들은 성막 주위에 모여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고, 길을 떠날 때는 성막을 거두어 이동하였고 다시 행군을 멈추면 성막을 치고 계약의 궤를 모셨다.

그런데 가나안에 정착한 후로 게약의 궤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옮겨왔을 때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솔로몬에 의한 성전건축 역시 하느님의 명에 의하여 건축되었다.(2사무엘7장) 그 후로 예루살렘 성전은 국가의 중심인 동시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 되었고, 천상의 지성소와 대응하는 지상의 지성소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성전은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신앙은 퇴색되고 상업주의와 결탁된 제관들과 상인들은 영리를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평소의 온화하고 자애롭고 사랑이 넘치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독설을 퍼부으며 마치도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극도로 진노하시는 모습을 보이신다. 이 모습을 상상해보자.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에 불타오르는”예수님의 진노하신 모습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과연 성전이 우리 삶의 중심인가? 하느님의 거룩한 집을 아끼는 열정에 불타오르고 있는가? 또한 우리의 몸 역시 주님께서 계시는 성전이다.“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1고린6,19)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3. 사람을 꿰뚤어 보시는 예수(2,23-25)


<성경본문>


23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뿐만 아니라

25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 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


<이해를 돕는 글>


이 이야기는 문맥상 성전에서 행한 예수의 자기 계시 내용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은 한다. 즉, 2장 12절과 같은 역할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는 예수의 표징을 보고서 믿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부정적인 반응이 소개됨으로써 “표징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더욱 심도 있게 구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예수의 표징을 보고서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된 “제자들”(2,11.22)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2,18.20)에 이어서 이제 예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믿는 자들”이 소개된 셈이다.


<주석>

[23절]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는 예수가 행한 표징, 곧 외적으로 드러난 기적을 보고서야 가지게 된 믿음인 것이다(6,2참조). 한마디로 기적에만 의존한 충분치 못한 믿음이다(4,45.48 참조). 달리 말하자면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할 표징을 제대로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상태의 믿음이다.

여기에서 “...보고”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테오레인’인데 이 말은 ‘구경꾼으로서 보다’라는 의미이다. 즉 그들은 예수의 표징을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능동적이 아니라, 단지 구경꾼으로서 이 광경을 본 것이다.


[24절]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신다. 즉, 예수는 그들의 믿음의 동기와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5절] 예수는 구약의 하느님 모습처럼(1사무 16,7; 1열왕 8,39; 시편 7,10; 38,10) 인간의 마음까지 알 수 있는 신적인 지식을 갖춘 자라는 것이다.



<묵상하기>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뚤어 보시는 분”(25b)이시다.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나의 위선, 거짓, 얄팍한 속셈, 부끄러운 죄상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히브4,12-13)

그러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위선을 탈(가면)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서 솔직해지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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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언제나 처음처럼(예로니모)

http://www.mncatholic.or.kr/sub3/john/john_3.htm

편집: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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