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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32: 십자가의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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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12 조회수3,270 추천수1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2) 십자가의 길 - 2



① 제1처

성 스테파노의 문(St Stephen’s Gate) 근처에 있는 성 안나 성당(Church of Saint Anne)에서 구시가(Old City)로 통하는 길의 왼쪽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우마리야 학교(Umariyya Boy’s School)에 이른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신 십자가의 길 제1처가 시작되는 곳이다. 바위산에 위치한 이 자리는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가 있었던 곳이다. 이 요새는 기원전 37-35년에 헤로데 대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요새의 이름은 헤로데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정해졌다.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중 신심에서 안토니아 요새는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이곳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인 요한 18,28-19,16의 배경으로 여겼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자리, 즉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주님을 위하여 도성이 ‘하난엘 탑’에서 ‘모퉁이 성문’에 이르기까지 세워질 것이다.”(예레 31,38) “대사제 엘야십이 형제 사제들과 함께 나서서 ‘양 문’을 세워 봉헌하였다. 또 문짝들을 달고, ‘백인 탑’까지, 그리고 ‘하난엘 탑’까지 이르는 구간을 봉헌하였다.”(느헤 3,1), “‘에프라임 문’ 위를 지나, ‘옛 문’과 ‘물고기 문’ 위, 그리고 ‘하난엘 탑’과 ‘백인 탑’으로 해서 ‘양 문’에 이르러, ‘경비대 문’에서 멈추었다.”(느헤 12,39)

유다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에는 안토니아 요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의 첫 번째 뜰에 있는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주랑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다. 요새는 50큐빗 높이의 바위 위에 세워졌는데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 이 요새는 헤로데 임금의 작품인데 그의 타고난 재주가 가장 잘 드러난다. 바위는 아래로부터 매끈한 돌판으로 덮여 있는데, 이것은 장식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올라가려거나 내려가려는 자는 누구나 미끄러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새 앞에는 3큐빗 높이의 성벽이 있고, 그 뒤로는 40큐빗 높이의 요새 전체가 솟아 있다. 요새 내부는 왕궁의 외관과 시설과 유사했는데, 각기 형태와 목적에 맞게 방들이 나뉘어져 복도와 목욕탕, 군인들이 진을 칠 수 있는 넓은 뜰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있다는 점에서 안토니아 요새는 하나의 도시와 같았고, 웅장한 모습은 궁전 같았다. 요새 전체의 모습은 각 모퉁이에 네 개의 망대가 있는 하나의 탑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중에서 세 개는 높이 50큐빗이고 남동쪽에 있는 망대는 높이가 70큐빗이어서, 이곳에서 아래를 보면 전체 성전 구역을 볼 수 있었다. 성전의 주랑 두 개가 모이는 모퉁이에서 양쪽 주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요새에는 항상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였는데 축제 때에는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주랑들에 배치되어 백성을 감시하며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만일 성전이 예루살렘 도성을 지키는 요새라면, 안토니아는 성전의 요새였으며 여기에 배치된 군대는 도성과 성전, 안토니아 요새, 이 셋 모두를 감시하였다. 예루살렘의 높은 지대는 헤로데 궁전이라는 요새를 가지고 있었다. 안토니아와 벳자타는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모든 언덕들 중에 가장 높았고 도시의 다른 한 쪽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북쪽에서 성전을 바라보는데 장애물이 되었다.”(『유다 전쟁사』 5권 238-247)

십자가의 길 제1처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안토니아 요새의 남은 흔적인 엑체 호모 아치(Ecce Homo Arch)를 볼 수 있다. 이 아치의 명칭은 빌라도가 요한 19,5에서 한 말인 “자, 이 사람이오.”에서 유래한다. 길의 오른쪽에는 시온의 수녀회(Sisters of Zion)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 안에는 과거 스트루티온 못(Struthion Pool)이 있었고, 수녀원 지하에는 돌이 깔려진 도로와 리토스트로토스(요한 19,13)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포장된 길의 돌들에는 로마 군인들의 “임금 놀이(King Game)”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게임은 주사위를 왕관 위에 놓는 이가 승리하는 방식이다.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안토니아 요새를 함락했던 당시의 상황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로마군은 아르테미시우스 달 12일(=기원후 70년 5월 30일경)에 토목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 달 29일(=6월 16일경), 즉 17일간의 계속된 작업으로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네 개의 둑은 그 규모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안토니아 요새에 있었는데, 제5군단이 스트루티온 못 가운데 세웠고, 또 다른 것은 제12군단이 약 20큐빗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유다 전쟁사』 5권 466-467)


② 제2처

십자가의 길 제1처인 우마리야 학교에서 길을 가로지르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채찍 수도원(Franciscan Monastery of the Flagellation)이 있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을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제2처이다. 이 수도원에는 프란치스코회 성서, 고고학 학교와 박물관이 있는데, 나자렛, 카파르나움, 주님 눈물 성당(Dominus Flevit)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 동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도원의 안뜰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예수 채찍 경당(Chapel of the Flagellation)”이다. 이 경당은 1929년 중세 때의 기초 위에 완전히 재건축되었다. 이 경당은 빌라도가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건을 기억한다.(마르 15,15) 그래서 이 경당에는 채찍질 당하시는 예수님(마태 27,26), 손을 씻는 빌라도(마태 27,24), 바라빠 장면(마태 27,21)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채찍 경당 맞은 편, 곧 수도원 안뜰의 다른 편 끝에는 “예수 사형 선고 경당(Chapel of the Condemnation)”이 있다. 20세기 초의 건물인 이 경당은 기원후 2세기 당시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의 동쪽 광장에 있던 돌로 포장된 도로 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도 로마군인들의 “임금 놀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③ 제3처

제2처에서 나와, 다마스쿠스의 문(Damascus Gate)에서 오물의 문(Dung Gate)으로 통하는 길을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제3처가 있다. 이곳에서는 예수님이 첫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한다. 제3처에는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의 옛 경당의 자리에 19세기 초에 다시 세워진 아르메니아 성당이 있다.


④ 제4처

제3처에서 약 15m 떨어진 곳에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만나는 모습의 부조가 있는 제4처가 있다. 여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작은 기도실이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8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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