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안티오코스 4세
마카베오기는?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을 가톨릭교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합니다. 히브리말 유다교 경전 목록에 들어있지 않아서 예로니모 성인도 이 두 권을 외경으로 여겼으며 개신교에서도 외경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권을 자주 인용해왔으며 결코 소홀히 여기거나 낮게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카베오기는 기원후 4세기에 와서 그리스도교 정전 목록에 등장하다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제2경전으로 확정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카베오기 상하권은 기원전 176~134년까지 약 반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역사를 전해주는 책입니다. 유다민족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으로 있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곧 헬레니즘 시대에 선민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자세히 전해주는 소중한 책입니다. 셀레우코스 통치 말부터 유다민족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 즉위 원년까지를 다룬 이스라엘의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 임금의 소통부재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은 외세에 휘둘려 쇠퇴일로를 걷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남 유다 왕국은 587년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어서 차례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됩니다.
때는?
당시 셀레우코스 왕국은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하고서 지중해로부터 이란의 평원지대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대륙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국은 밖으로는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의 압박으로 인해서, 안으로는 끊이지 않는 왕권 다툼으로 인해 급격하게 쇠약해져가고 있었습니다.
마카베오 상하권의 주제는?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이 벌이는 독립운동과 종교의 자유를 되찾고자 투쟁하는 이야기가 골자입니다. 상권은 세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기록한 삼부작으로 되어있습니다. 첫 부분은 유다 마카베오의 무용담을(3,1-9,22), 둘째 부분은 요나탄의 무용담을(9,23-12,53), 셋째 부분은 시몬의 무용담을(13,1-16,24) 전해줍니다. 시몬은 유다 민족의 하스몬 왕조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마카베오서 상권 저자의 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후계자들을 소개합니다. 다음 구절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어떤 인물인지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1,1) 그 후계자들 가운데 특히 유다 지방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종교를 강요했던 안티오코스 4세를 1장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에게서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기원전 175년]에 임금이 되었다.”(1,10)
안티오코스 4세는 누구입니까?
그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흔히 에피파네스로 불리는데 이는 그가 신(神)으로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이름만 보아도 그가 어떤 임금인지 짐작이 갑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신으로 떠받들어야 하는 인물이니 말입니다. 기원전 169년에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점령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성전을 황폐화시킵니다.
임금 안티오코스는?
성서는 그가 어떤 임금인지 전해줍니다. “그는 거드럭거리며 성소에 들어가 금 제단, 등잔과 그것에 딸린 모든 기물, 제사상과 잔, 대접과 금향로, 휘장과 관을 내오고, 성전 정면에 씌워져있던 금장식을 모두 벗겨냈다. 안티오코스는 마구 살육을 저지르고 오만불손한 말을 한 다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1,21-22.24) 그가 성전에서 약탈해간 모든 금품 총액이 얼마나 되는지 다음 구절이 밝혀줍니다. “이렇게 하여 안티오코스는 성전에서 천팔백 탈렌트를 실어내어 안티오키아로 급히 돌아갔다.”(2마카 5,21)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175-164년까지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립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은?
당연히 안티오코스 4세입니다. 자신을 신격화 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에피파네스(신으로 나타난 자)’ 대신에 ‘에피마네스(미친 자)’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오만이 하늘을 찌를 듯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폭군 가운데서도 가장 잔악한 폭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가 무슨 정책을 폅니까?
한마디로 안티오코스 4세는 자기 나라의 문화를 제국 전체에 대입시켜 그리스문화로 통일제국을 이룩하려 했습니다. 그의 욕망은 유다민족에게서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힙니다. 그가 유다 민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의 가치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교는 물론 유다 고유문화까지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폭정이나 횡포에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가차 없이 죽이거나 욕설을 퍼부으면서 잡아갔습니다.
항거하는 유다인들은?
삽시간에 그들은 무력화되고 그 가정들은 하루아침에 초상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갔다...... 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5-28)
그렇다면 유다인이 일치단결하여 모두 그의 정책에 항거했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지난날 이방인들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들과 적대관계를 맺고 지냈기 때문에 당했던 아픔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타협하거나 그들과 조약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현실주의자들은?
유다인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 관습이나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에 동화되고자 합니다. 마카베오서 저자는 이들을 변절자들이라고 칭합니다.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1,11.14-15)
어디 그뿐입니까?
유다 민족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갖 보물과 제례에 쓰이는 성스러운 기물들을 수탈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간 안티오코스 4세! 이태 후에 그는 조공 징수원들을 이끌고 다시 나타납니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친교 사절단처럼 등장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겉모양만 보고서 그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읍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약탈과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태 뒤 임금이 유다의 성읍들에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니, 그자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그가 평화로운 말로 주민들을 속이자 그들은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 도성을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많이 죽였다...... 그의 군대는 또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1,29-32)
그리하여 축제일은?
통곡의 날로 바뀝니다. “예루살렘 성소는 광야처럼 황폐해지고 축제일은 슬픔으로 변하였으며 안식일은 조롱거리가 되고 그 명예는 치욕이 되어 버렸다.”(1,39-40)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7월호, 신교선 가브리엘(신부, 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