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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의 비유16: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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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5 조회수2,813 추천수1

신약의 비유 (16)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탕아 끌어안은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 사랑받는 비유이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 중에 길이가 가장 길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빼어난 루카복음서의 백미이다.

이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리는 것(15,1-2)에 대한 대답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5,4-7), 되찾은 은전의 비유(15,8-10)와 함께 주어진다.

이 비유는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 상속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유산 상속에 관한 율법(민수 27,8-11과 신명 21,15-17)에 의하면 유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이루어지고, 최소 생존권을 보장할 만큼 딸들에게 우선 상속되며, 나머지가 아들들에게 상속되는데 장자는 두 몫을 받는다. 따라서 작은아들의 요구는 무례하고도 뻔뻔스러운 것인데, 마치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망나니 작은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아들은 큰아들 몫을 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을 받아 처분해서는 먼 고장으로 떠나는데, 이는 실제 거리가 멀다는 것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아버지와 집에서 멀어진 것을 의미한다. 작은아들은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탕진하게 되는데, 큰아들의 비난에서처럼 비윤리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재산을 전부 잃은 작은아들은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된다. 유다인의 전통과 율법에 의하면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라 먹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탈무드에 의하면 돼지 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까지 하였다. 작은아들의 추락은 돼지 치는 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돼지들이 먹는 음식으로라도 배고픔을 면하기를 바라는, 즉 돼지를 부러워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데,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 온전한 의미에서의 회개는 아니다.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났을 때를 위해 준비하는 대사의 내용을 보면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회개의 서곡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사실 작은아들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과 부자 관계를 깨뜨렸다는 것을 인정하며(“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을 품팔이꾼으로라도 써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작은아들이 돌아오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는 멀리에서부터 아들을 발견하고 가엾은 마음이 든다. 가엾은 마음은 복음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연민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는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다. 이는 작은아들이 준비한 대사를 듣기도 전에 아버지 편에서 보여주는 용서와 화해의 표시이다. 그 아버지의 품에서 작은아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과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세 번째 대사를 듣기도 전에 아버지는 마치 들어야 할 것을 다 들었다는 듯이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과 반지, 그리고 신발을 신겨줄 것을 명한다. 이 모든 것은 작은아들이 이제 온전한 아들로서 가족과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서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라고 한다. 돌아온 작은아들은 단순히 아들로서가 아니라 귀한 손님의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된 인간은 없다

들에서 돌아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큰아들은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타이르려고 나온 아버지를 비난한다. 큰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어떤 작은 보상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작은아들이 돌아오니 잔치를 벌인다고 불평한다. 돌아온 작은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고, 동생이 비윤리적인 생활을 했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동생을 “당신의 저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그를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을 “얘야”로, 작은아들을 “너의 저 동생”으로 부름으로써 가족관계의 회복을 꾀하며 큰아들의 상속권을 다시 확인해준다(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세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가부장적 모습이 아니라 자신과 대립하는 아들들을 모두 포용하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 모습이다. 둘째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당신의 메시지와 행동을 설득하신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상선벌악의 논리를 내세우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치유할 수 없는 환자는 없듯이 하느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된 죄인이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셋째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의 선포를 받아들여 응답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합류하게 된 것을 축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1일, 
이성근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

※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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