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필리스티아
1. 그때 그 자리
기원전 12세기 말, 지중해 크레타 섬 출신으로 알려진 해양민족이 이집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데, 그 일부가 현재의 가자에 해당하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자리 잡는다. 훗날 필리스티아인으로 불린 이들은 ‘필리스티아 펜타폴리스’라고 불리는 다섯 도시, 곧 다곤 신전으로 알려진 아스돗, 아스클론, 가자, 갓, 에크론에 자리잡는다.(1사무 6,16-17) 유다민족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제국이 ‘유대아(유다인의 땅)’라는 속주명을 필리스티아의 땅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티나’라고 바꾼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지역은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살았던 민족 필리스티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사랑해야 할 ‘원수’
철제 무기를 지닌 필리스티아인들은 청동 무기를 사용하던 이스라엘을 제압하고 해안지방은 물론 가나안 중부까지 진입한다. 구약성경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이 제법 등장한다. 삼손의 영웅담(판관 14-16장), 하느님의 계약 궤를 빼앗긴 이야기(1사무 5장),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한 이야기(1사무 17장)는 모두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에게 억눌려 지낸 시기의 일화들이다. 물론 사울의 시기를 받게 된 다윗이 필리스티아의 갓 임금인 아키스에게 일 년 넘게 자신을 의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1사무 27장) 사울 임금은 끝내 필리스티아인들을 제압하지 못했으며 그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한다.(1사무 31장)
이 모든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두 민족이 오랜 원수지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필리포스가 가자와 아스돗에 이르렀음을 전해주는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는 무심히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사도 8,26-40) 가자와 아스돗은 해안에 인접한 필리스티아 5대 도시 가운데 각각 해안에 가까운 남쪽과 북쪽 도시에 해당한다. 곧 그가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두루 다녔음을 뜻한다. 원수였던 민족의 땅에 복음을 전한 사도에게서 새로운 관계를 여는 씨앗이 심기는 것을 본다. 원수는 밀어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새 계명의 씨앗.
3. 평화의 계약
오랜 세월 이 두 민족은 ‘원수 관계’에 있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살이를 하면서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몸 붙여 살았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들통났을 때, 그는 사라를 돌려주는 것은 물론 양, 소, 남녀 종들을 주면서 그 땅에서 함께 살도록 허락하는 관대함을 보여준다. “보시오, 내 땅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으시오.”(창세 20,8-15)
아들 이사악도 기근이 들자 아비멜렉의 땅에 머물며 그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사악이 점점 부유해지면서 우물을 사이에 두고 그곳 목자들과 이사악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게 된다. 이사악은 평화로운 사람이었던 듯하다. 시비를 거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거듭 자리를 옮겨가며 새로이 우물을 팠으니 말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비멜렉은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는 친구와 자기 군대 장수를 데리고 직접 이사악을 찾아온다.
이사악이 그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소. … 우리는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소.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에게 좋게만 대해 주었으며 그대를 평화로이 보내주었듯이, 그대도 우리한테 해롭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제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은 사람이오.” 이사악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맹세하였다. 그런 다음 이사악이 그들을 보내자, 그들은 평화로이 그를 떠나갔다.(창세 26,27-31)
4. 오늘 이 자리 - 누구의 땅인가?
창세기가 전해 준, 축복과 평화를 나누던 잔치와 맹세는 후손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땅에는 비록 필리스티아인의 후손은 아니지만, 약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오랜 세월 살아왔다. 그런데 흩어졌던 유다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1948년부터 이곳은 본격적인 전쟁터가 되었다.
1993년 9월,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은 중동평화협정에 서명한다. 가자지구는 축제분위기에 싸였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부족해서일까? 이스라엘 총리는 암살되고, 상황은 악화되었으며, 최근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대규모로 공습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인가?’라는 물음에 ‘답은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답은 있다. 성경은 땅이 주님의 것이라고 천명한다.(레위 25,23) 이사악이 차지했던 ‘넓은 곳’이든 아비멜렉이 ‘내 땅’이라고 부른 곳이든, 땅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니 함께 머물러야 할 자리다. 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고자 땅을 나눌 마음이 부족한 것 아닌가? 모두 차지하겠다는 인간의 마음이 평화의 계약을 깨뜨린다.
시비를 거는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는 대신, 하느님의 약속을 간직한 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거듭 우물을 파고 정착했던 이사악을 떠올려 본다. 그런 그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했고 그의 땅은 넓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보다 크고 강한 세력이었던 필리스티아 임금으로 하여금 먼저 찾아와 평화조약을 청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진정한 승리는 이러한 것이 아닐까?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마태 5,5)는 예수님 말씀을 이사악에게서 보게 된다. “그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으시오.”라는 필리스티아 임금의 초대를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건네야 할 차례가 아닐까? 땅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모두는 그 땅에 나누어 살다가 떠나는 지상의 순례자들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우물, 2014년 9월호, 송미경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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