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야기] (29) 에세네
광야서 엄격한 공동체 생활한 율법주의자
- 에세네는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세상을 떠나 광야에서 엄격히 율법을 지키며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사진은 에세네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쿰란 유적지. 평화신문 자료사진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와 유다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소(小) 플리니우스, 교부 성 히폴리투스 주교와 에우세비우스 주교 등은 자신의 저서에 한 특별한 유다 종파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에세네’이다.
에세네는 팔레스티나 사해 인근 엔게디 지방을 거점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오직 동료뿐인 집단 속에서 아내도 사랑도 돈도 없는 가운데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극히 엄격한 규율 생활을 했다”(요세푸스 「유다 고대사」참조). 필론에 따르면 이들 공동체는 적게는 10명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전체 인원은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51년부터 발굴한 도기 공방과 물 저장고, 식당, 1000기가 넘는 묘지석 등이 필론의 글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에세네는 시리아어 ‘에세노이’에서 나온 말로 ‘거룩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자신과 조상을 가리켜 부른 ‘하시딤’(경건한 사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에세네는 기원전 150년께 이스라엘 하스모네아 왕조가 이방인의 적과 화친 정책을 펴려 하자 이를 반대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종말을 기약하며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종파를 형성했다.
이들의 수장인 ‘정의의 스승’은 한평생 하느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철저히 준수하며 수호할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자신들과 공동체를 ‘야하드’라 부르며 ‘빛의 아들’로서 악의 무리인 어둠의 자식과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생활했다. 또 자신들은 종말에 선별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시험을 치르고 2년간 수련을 거친 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입 단원은 공동체에 전 재산을 바친 다음 규율과 장상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고, 부정한 사람들과 떨어져 진리와 정의, 사랑 속에서 생활할 것을 고백했다. 이렇게 단원으로 받아들여지면 매일 몇 차례씩 몸을 씻으며 정결례를 하고, 흰옷을 입고 하루의 정한 시간에 공동기도를 바치고 공동 식사로 채소만 먹으며 생활했다. 또 바리사이보다 훨씬 세심히 율법의 규정을 지키고 히브리말만 사용했다. 정의의 스승 밑에는 12명으로 구성된 참사회가 공동체를 운영하고 규율을 어긴 단원들을 단속했다.
하스모네아 왕조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정의의 스승을 처형하자 에세네들은 다마스쿠스로 피신했다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이후 쿰란으로 되돌아왔다. 이들은 서기 68년 갈리아(프랑스)인과 게르마니아인으로 구성된 로마군 티투스 장군 휘하의 제10군단에 의해 유린당할 때까지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로마군의 학살 와중에도 에세네는 그들의 가장 귀중한 보물인 성경 필사본 두루마리를 비롯해 많은 문서를 도기에 넣어 인근 절벽 동굴에 숨겼다. 이 두루마리들은 1947년 한 양치기에 의해 발견됐고 이후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이때 발굴된 문서를 ‘쿰란 사본’이라 부르는데 구약성경과 쿰란 공동체 규칙,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 등 예수 시대 전후 유다이즘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쿰란 사본은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활동한 배경의 직접 정보를 전해주는 문서로 종교사 연구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기원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본이어서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수님과 에세네의 가르침 사이에는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다. 유사성은 오랫동안 전승된 유다이즘을 같이 상속하고 있는 점이다. 사두가이는 모세오경에만 전승을 두고 있지만, 예수님과 에세네ㆍ바리사이는 경건주의인 하시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대해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위에 있다고 하신다(마르 2, 27). 반면 에세네는 안식일을 매우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리사이는 에세네보다 완화된 안식일 규정을 제시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글자보다 그 정신을 더 중요시하는 점에서 에세네ㆍ바리사이와 차이를 보이신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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