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고뇌하는 욥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을 대라면? 누구나 행복 못지않게 고통을 꼽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신앙인이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겠습니까?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탄원기도를 바치는 시인은 스스로 경험했습니다. 인간 삶 속에 기쁨과 즐거움이나 자랑거리보다는 문자 그대로 ‘고생과 고통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은 사정을 봅니다.
욥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그는 요약해줍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욥 7,1) 그의 탄식은 이어집니다. “그늘을 애타게 기다리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7,2-3)
욥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는 곧 욥기의 짜임새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욥기 맨 앞부분(1-2장)과 맨 끝부분(42,7-17)은 산문체인데 반해 몸통 부분은 운문체로 되어있습니다. 다만 세 친구의 담론 뒤에 나오는 엘리후의 연설 도입부(32,1-5)는 운문 곧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산문체로 되어있습니다. 욥기 줄거리는 산문으로 된 앞부분과 끝부분 안에 들어있습니다(1-2장+42,7-17).
욥기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여러 자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던 욥이 갑자기 이유 없이 불행을 연거푸 겪으면서 파멸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욥에게 머슴들이 앞뒤를 다투어가며 엄청난 사건을 하나씩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욥 1,13-20)
천상어전회의는?
어느 날 욥을 중심으로 한 제1차 천상어전회의가 열립니다.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주님 앞에 섰다.”(1,6-12) 그때 사탄이 주님께 내기를 겁니다. 여기 나오는 사탄은 ‘고발자, 반대자, 적수, 원수’를 뜻하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귀가 아닙니다. 천상이나 온 누리 최고의 존재는 하느님이십니다. 고대인들은 하느님의 천상어전을 세상 임금통치제도와 비슷하게 상상했습니다.
어전회의에서 벌어진 내기는?
때마침 하느님께서 신심 깊은 욥을 칭찬하시는 바람에 내기가 시작됩니다. “욥과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없다.”(1,8ㄷ) 이런 기회를 놓칠세라 사탄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섭니다. 욥이 많은 축복 속에 살기에 주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탄이 먼저 내기를 겁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1,11) 이에 주님께서는 사탄에게 허락하십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1,12)
사탄이 과연 하느님께 내기나 겨루기 상대가 됩니까?
물론 그 어떤 존재라도 하느님과 내기를 하거나 그분과 겨룰 만한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욥기에서는 한 신앙인 욥을 두고 사탄이 하느님과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내기는 단지 문학적 도구 역할을 할 뿐입니다. ‘무죄한 신앙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연거푸 닥쳐오는 재난은 도대체 왜 일까?’ 하느님과 사탄이 벌이는 내기는 나날이 깊어지는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어내는 신앙인의 모습을 그리는 문학적 도구, 곧 표현양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욥은?
그저 삽시간에 모든 재산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다 잃고 맙니다. 그럼에도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은 다음 외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몸, 알몸으로 그리(땅으로) 돌아가리라.”(1,21) 욥은 신앙인을 대표해서 ‘세상에 빈손으로 태어났듯이 언젠가는 빈손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합니다(참조: 2티모 6,7).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집회 17,1; 참조: 창세 3,19)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는 날부터 만물의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몹시 힘든 일이 맡겨졌고 무거운 멍에가 아담의 아들들에게 지워졌다.”(집회 40,1)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 알몸으로 되돌아간다. 제 노고의 대가로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전혀 지니지 못한 채.”(코헬 5,14)
욥은 ‘허무함을’ 무엇으로 채웁니까?
욥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인간 내면의 세계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간은 단 하루도 온전히 만족하고 살기 힘듭니다. 무엇이든 어디든 아주 조금이라도 모자라고 부족하여 내일에 희망을 걸고 하루를 보냅니다. 욥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참 신앙인으로서 아주 처참한 처지에서도 영원하신 분께 찬미기도를 읊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ㄴ) 다윗 임금은 일찍이 아들 솔로몬을 임금으로 세우기에 앞서 주님께 예물을 봉헌하며 찬미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무엇이며 제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 같은 예물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오기에, 저희가 당신 손에서 받아 당신께 바쳤을 따름입니다. 당신 앞에서 저희는 저희의 모든 조상처럼 이방인이고 거류민입니다. 저희의 나날은 이 땅위에서 그림자와 같고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1역대 29,14-15)
욥의 깊은 신앙 때문에 내기에서 실패한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내기에서 이기려고 기를 쓰고 덤벼듭니다.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도 가장 나약한 부분인 목숨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인간은 목숨을 부지하거나 연장하기 위해 무슨 대가라도 치르며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져도 자신의 생명에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으니까 욥이 하느님을 배반하거나 그분께 불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느님께 욥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그를 병들게 해보시라고 주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뼈와 그의 살을 쳐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욥 2,5) 그분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 그의 목숨만은 남겨 두어라.”(2,6ㄷ)
욥에게 닥친 새로운 시련은?
다음 구절이 답을 줍니다.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욥을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쳤다. 욥은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2,7-8) 지금 욥은 나병환자나 다름없는 중증 피부병환자가 되었으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처지에 이릅니다. 극기야 그의 아내까지 투덜댑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2,9)
그렇게 처참한 지경에 이른 욥은?
그럼에도 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결코 등 돌리지 않습니다. 욥은 하느님을 포기한다는 말을 모릅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생의 출발점이며 종착점이시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0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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