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의 비유21: 공관복음서의 비유 정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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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10-25 | 조회수3,415 | 추천수1 | |
신약의 비유 (21) 공관복음서의 비유 정리 <끝> 지금 이 순간 천국의 삶 체험하며 살아야
예수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에만 나오며,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다는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비유란 그리스어 ‘비교’에서 나온 것으로 “영원하고 초월적인 실제를 인간 경험과 친근한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유와 우화가 구별되면서 비유의 정의는 더욱 명확해졌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따른다. 어려움은 무엇보다 복음서의 어떤 단락이 비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20개에서 60개까지 열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30~40개 정도를 비유로 본다.
예수 비유의 특징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지만, 비유로 가르치신 최초의 스승도 아니고 유일한 스승도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으며, 다른 비유에 대한 우월성과 독창성이 드러난다.
우선 예수의 비유는 청중들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이는 여러 전승에서 나타나며,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진정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이는 특별히 청중들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 질문들을 통해 예수께서는 청중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거나 대답을 촉구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청중의 관심을 이끌고 이야기에 동참시키신다.
두 번째로, 예수의 비유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어떤 주장이나 이론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예시로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청중들에게 전달된 독립적이고 통일적인 단락을 형성한다. 또 랍비들처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매우 자유로운 의미로 비유를 사용하셨다.
세 번째는 소재의 단순함과 친숙함이다. 청중들은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종교적 문화적 기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유다교 전승에 대한 막연한 지식, 당시의 일상적인 지식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번째는 하느님에 대해 놀라운 방법으로 묘사하신다는 점이다. 분명히 신학적이면서 이론적인 분석이나 하느님의 속성을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리하면서도 일상적인 은유를 통해 하느님과 친밀함과 친교를 강조하신다.
다섯 번째는 많은 비유에 나타나는 의외성과 과장법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포도원 주인, 두 아들의 아버지, 잃어버린 양의 목자나 결혼잔치를 벌이는 왕의 모습에 비교된다. 이 등장 인물들은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태도나 행동을 보이며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과장법도 보인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왕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는데,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으로 계산해도 이 액수는 6조 원에 해당한다.
여섯 번째는 유다교의 지혜 전승과 종말론적 전승의 합치이다. 현명한 처녀들이나 충실한 종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씀하시는데, 비유에서 현명함과 영리함은 종말에 대한 이해와 준비하는 자세를 일컫는다.
완성될 하느님 나라 준비해야
교부 시대부터 근대까지 비유를 해석하는 주도적 방법은 우화적 해석이었다.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의 교의에 맞추어 해석하는 방법이었다. 비유와 우화가 구별되면서 우화적 해석은 종결됐지만,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 비유와 우화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화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해석의 대상에 있어서도 현대 학자들은 비유를 현재 맥락에서 분리하여 예수의 공생활 맥락에서 본래의 의미와 환경을 규명하려고 시도하였고, 그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역사적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확실성을 위해 성경 본문의 맥락 안에서 해석할 것을 더 강조하기도 한다. 여러 방법론을 통해 예수의 비유는 그 풍요로운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
비유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핵심적 주제인 하느님 나라와 그 하느님 나라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집중돼 있다. 하느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자애로운 통치권 혹은 통치 행위를 지칭하며 악의 세력을 굴복시키고 억눌리고 소외된 백성을 구원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실현되었음과 미래에 완성될 것을 가르치신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비유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 사랑에 항구하신 분으로 잃었던 사람을 찾아 친히 나서시고, 되찾은 사람들에 대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는 비록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에게 거부당하지만 하느님의 위업으로 성장하고 풍성한 결실을 볼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되며 심판을 동반하는 것이다. 심판은 징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 구원의 실현으로 보아야 한다. 종말은 늦어질지라도 반드시 올 것이며, 언제 닥치더라도 충실하고 현명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며, 지금부터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체험하며 완성에 대한 희망으로 사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10월 26일, 이성근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
이번 호로 ‘신약의 비유’ 연재를 마칩니다. ※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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