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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아합이 아람 사람들과 싸운 전쟁 이야기(1열왕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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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26 조회수2,872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112)


“내가 라못 길앗으로 싸우러 가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1열왕 22,6)

 

 

신명기의 관점에서 역대 임금들을 판단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열왕기는 세속 역사가 제시하는 소홀히 한다. 기원전 9세기 오므리(1열왕 16장)와 기원전 8세기 예로보암 2세(2열왕 14장)처럼 치적이 훌륭한 임금에게도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관습적인 판단을 내린다.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문헌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사마리아라 하지 않고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와 아합 시대에 북왕국의 국력이 막강해졌고, 예로보암 2세 시대는 북왕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전성시대였지만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이런 사실을 무시한다.

 

열왕기 상권 20장과 22장은 아합이 아람 사람들과 싸운 전쟁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아합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엘리야 예언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아합을 거슬러 활동하는 엘리야 이야기를 전하는 열왕기 상권 17-8장, 21장 그리고 열왕기 하권 1장과 같은 원천에서 나올 수 없는 구별되는 자료임이 분명하다.

 

열왕기 상권 22장은 잘 맞물려진 여러 장면으로 구성된 작은 드라마다. 아합이 아람 사람들과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임금에게 아부하는 예언자들에게 물어보자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하지만 냉소적이고 위협적인 미카야는 패전을 예언했다. 미카야가 아니라 예언자 무리의 의견을 따라 전장에 나간 아합은 결국 패하여 전사했다. 이야기가 무척 생생한 것으로 보아, 사건보다 아주 후대에 쓰였다고 보기 어렵다. 저자는 아합을 공정하고 현명한 임금,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키는 용감한 임금, 그리고 적어도 주님과 예언자들을 존경하는 신심 있는 임금으로 제시한다.

 

손무(孫武)와 함께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 최고의 병법가였던 위(魏)나라 오기(吳起)는 76번 수행한 전쟁에서 64번 승리하고, 12번 무승부를 기록하며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불패의 장수’라 불렀다. 오기가 위나라 무후왕과 회의할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날 회의에서 어떤 신하도 무후왕보다 나은 의견을 내지 못했고, 회의가 끝날 무렵 무후왕은 자신의 능력에 만족해 만면에 미소가 가득 찼다. 그러나 불패의 장수, 최측근 오기가 발언을 시작하자 무후왕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무후왕은 총명했지만 독선적이고 교만한 제왕이었다.

 

“왕이시여, 옛 초(楚)나라 장왕이 국사를 놓고 회의를 했는데, 장왕보다 뛰어난 의견을 내는 자가 없었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장왕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한 신하가 ‘어찌 그런 걱정스런 얼굴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장왕이 대답했습니다. ‘세상의 성현을 찾아 스승으로 공경하면 천하의 왕이 될 수 있고, 벗으로 삼으면 패자(覇者)가 된다고 하였소. 그런데 지금 내 주변에는 나보다 뛰어난 신하가 없음을 알았소. 신하들이 모두 나보다 못하니 초나라의 앞날이 걱정될 뿐이오.’ 이처럼 장왕은 신하의 무능을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오기가 말을 마치자 무후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오기의 병법서 <오자>(吳子)의 ‘도국’(圖國)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기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으로 위(威), 덕(德), 인(仁), 용(勇)을 꼽았다. 전국시대 법가(法家)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는 지도자를 셋으로 나눴다. 삼류 지도자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고, 이류 지도자는 남의 힘을 이용하고, 일류 지도자는 남의 능력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묵상주제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께 아무런 보탬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선만덕을 갖추신 하느님은 우리의 봉사나 선행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봉사나 선행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봉사와 선행이 위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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