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말씀 그루터기: 나쁜 임금 므나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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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11-11 | 조회수3,170 | 추천수1 | |
[말씀 그루터기] 나쁜 임금 므나쎄
지난여름 유서 깊은 큰 성당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성당 전면에 아주 커다란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다윗, 솔로몬, 요시야, 그리고 므나쎄 조각들이었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므나쎄가 왜 여기에? 므나쎄는 가장 나쁜 임금이었는데?
다윗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이지요. 솔로몬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여러 가지 잘못들이 업적을 깎아먹었을지라도 분명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임금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요시야와 므나쎄.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입니다. 므나쎄가 요시야의 할아버지이니 시대 순으로 하면 요시야가 나중 인물입니다. 손자 요시야는 다윗 다음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임금인데 특히 열왕기 저자는 그를 이상형으로 묘사합니다.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했는데,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율법서의 규정에 따라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상숭배를 척결한 것은 물론이요, 주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도 예루살렘에서만 드리게 하여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요시야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왕국은 요시야 이후로 멸망의 길을 걸었을까요? 열왕기에는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나쎄가 하느님의 뜻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기 때문에 하느님은 유다왕국을 멸망시키시기로 이미 결정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아무리 잘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므나쎄는 모세의 율법, 특히 신명기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산 사람입니다. 아버지 히즈키야가 허물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군대를 경배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고 요술과 마술을 부렸으며, 영매와 점쟁이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신명기에서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가며 다했습니다. 이렇게 요시야와 므나쎄는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훌륭한 임금 요시야는 사십 세에 전사하고 맙니다. 그것도 아시리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시리아를 도우러 오던 이집트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므기또 전투에서 죽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던 그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다윗 왕조는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요시야가 죽은 뒤 유다왕국의 역사는 계속해서 기울어 갔습니다.
반면 므나쎄는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꼭 동화 속 행복한 결말처럼 들리지요?(그게 문제입니다). 그는 열두 살에 임금이 되어 장장 55년 동안이나 유다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저는 학생들에게, 므나쎄나 그 아들 아몬이나 나쁘기로 말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데 므나쎄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더 비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오래 살았으니까 죄도 더 많이 누적되었으리라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열왕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와 병행되는 역대기에는 열왕기에 없는 부분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역대기 하권 33장 10절에서 17절까지 므나쎄의 회개 부분입니다. 이 단락에 따르면 므나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시리아 군대를 보내시어, 그 장수들이 므나쎄를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그때 곤경에 빠진 므나쎄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비를 간청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호소를 들어 주시어 그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므나쎄는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이전에 자기가 세웠던 낯선 신들의 제단과 우상들을 허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에 들어있지 않은 이 부분은 아마도 역대기 저자가 추가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인과응보의 원칙을 강조했던 역대기 저자에게 므나쎄처럼 나쁜 임금이 55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려면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겠지요. 이렇게 보면 므나쎄의 회개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회개는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역대기 저자에게 므나쎄의 회개는 그의 모든 죄악을 씻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전에 아무도 므나쎄가 회개했다는 역사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역대기 저자에게는 므나쎄가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했다면 용서를 받고 오랫동안 왕위에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거슬렀고 허다한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분명 들으시고 응답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므나쎄를 하느님 앞에 합당한 임금으로 세워 주어야 했습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 보았던 그 성당에 이스라엘 임금들의 상을 세워 놓은 사람에게도, 회개한 므나쎄는 다윗, 솔로몬, 요시야에 버금가는 인물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므나쎄와 비슷한 인물로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편에 매달렸던 강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순간에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평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보고 화를 내고 싶었던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계명들을 지키려고 수십 년 동안 애를 쓰며 살았던 바리사이들은 그 우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인간적인 셈법으로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계산입니다. 저의 계산법으로도 뭔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안 될 것 같은, 성실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할 만한 계산입니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에게 잘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저는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꼭 흥부처럼 박을 타서 큰 부자가 된다거나 기복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스스로 행복해지고 또 분명 그만큼 사람들에게서도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잘못한 사람에게 너그럽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을 망쳐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안할 일을 하지 말지!’라고 생각합니다. 피해를 끼치는 사람을 봐주지 못하는 제가 만일 요시야의 위치에 있었다면, 나라가 기울어지게 할 만큼 하느님을 거슬렀던 므나쎄가 그 일을 다 저질러 놓고 회개 한 번 했다고 해서 다윗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면 분했을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더 기뻐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 때문에 잔치를 연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저는 큰아들처럼 살기를 원하고, 또 큰아들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더 원합니다. 사고 치지 않고, 문제 일으키지 않고, 피해 입히지 않고, 자기 일 착실하게 잘하는 사람들.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고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 완벽하지요! 그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임금으로서든, 사도직에서든, 공동체에서든, 자기 자리 잘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평탄하게 살기를 더 원합니다. 특히 같이 일하기 위해서는 큰아들이 백배 낫습니다. 아무리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성인이 되었다 해도, 저는 그렇게 속 태우게 만드는 사람하고는 피곤해서 못 살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임금 네 명을 뽑으라고 했다면 결코 므나쎄는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살펴보면서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준은 이 세상의 기준과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임금들을 평가하는 우리의 기준이나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하느님의 기준과 같아질 때까지 우리는 아직도 무수히 넘어지고 엎어지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가 회개하는 므나쎄가 될 때에야 조금 깨닫게 되겠지요.
[땅끝까지 제84호, 2014년 11+12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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