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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4: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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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3 조회수3,890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도 죽지 않은 이유는?



- 다니엘 매클라이즈 작, 노아의 제사(창세 8,20─9,17 참조)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아름다웠더라고 / 가서 조용히 말하리라.” 세상 소풍이 끝나고 귀천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추한 것뿐이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창세기의 첫 부분은 우리에게 그 대답을 알려 줍니다.

창세기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12장을 기점으로, 1-11장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닌 온 인류의 기원에 관한 내용이기에 태고사 또는 원역사라고 불립니다. 12-50장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성조들에 관한 전승을 담고 있습니다.

1-11장에는 두 가지 모습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 선과 악,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죄입니다. 여기서 다시 분기점이 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는 3장입니다. 그 이전까지의 세상을 특징짓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 등)입니다. 1장의 창조 이야기와 2-3장의 창조 이야기는 서로 다른 전승들이지만, 공통적으로 1-2장은 하느님께서 처음에 생각하신 그대로의 ‘좋은’ 세상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는 3장 이후로 인간의 죄가 거듭되고 그 아름다운 세상이 망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현실은 선과 악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분명 아름답고 좋은 것들도 있고, 추하고 악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명확하게, 본래의 세상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다고 단언합니다. 비록 죄가 세상에 들어와 그 ‘좋음’이 손상되기는 했어도, 세상은 그 자체가 선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첫 페이지에서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하는 구약 성경의 세계관은, 창조의 선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요약됩니다. 구약 성경의 세계관은 영과 육을 구별하면서 물질을 악한 것이라고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립됩니다. 물질은 선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4장에서는 카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6장에서는 사람들의 악이 온 땅에 가득 차서 하느님께서 창조를 후회하시고 홍수로 모든 것을 없애기로 작정하시는 데에 이릅니다. 창조 이전과 같은 혼돈 상태로 되돌리시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11장에는 인간이 하느님께 도전하는 바벨탑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3-11장은 인간의 죄가 점점 증가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1-2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세상은 점점 추하게 변해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3-11장은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매번, 인간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축복이 죄를 지은 인간을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봅시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는 날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지만(창세 2,17), 아담을 죽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아담을 죽이셨다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역사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쫓아내시면서도 오히려 가죽 옷을 입혀 주시어 그를 보호해 주십니다.

카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 해서 다른 사람이 카인을 죽이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카인에게 표를 해주시어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니다. 오히려, 카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은 카인을 죽이려는 자에게 일곱 배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죽이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하느님은 방주를 마련하게 하시어 인간과 모든 동물들이 보존되게 하십니다. 홍수가 끝난 다음에는 노아가 바치는 제사의 향기를 맡으시고,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 8,21)고 말씀하십니다. 진흙으로 빚어져 죄로 기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고, 그런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키지는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경우도, 하느님은 인간의 죄가 하늘까지 이르기 전에 그 교만을 먼저 꺾어 흩으심으로써 인간이 멸망을 피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3-11장의 이야기들은 죄의 증가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매번 그 인간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 축복의 힘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죄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더라면 인류 역사는 아담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본래부터 선하게 만드신 세상과 그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죄보다 더 강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이 세상을 망가뜨려도,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자비를 꺾지는 못합니다.

세상은 선합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면 성경의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고 이 세상의 세계관과 타협한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세상은 타락했고 말세이고 이러다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창세기의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손상되어 있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후에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지혜 1,14).

[평화신문, 2014년 12월 21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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