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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말씀 그루터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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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15 조회수2,973 추천수1

[말씀 그루터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어느 날 갑자기 이 말씀이 귀에 들어 왔습니다. 발? 왜 입이 아니고? 

 

보통 기쁜 소식은 말로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동으로도 전하지요. 어떤 경우이든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인가를 해 주면, 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데에는 부수적인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갑니다. 세상 곳곳에 계신 선교사님들은 더 그러시겠지만 제 경우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제 월말이 되어 공동체 결산을 했더니 지난달 저의 교통비가 24만 원이 나왔습니다. 처지가 딱한 수녀님들이 긴급하게 강의를 부탁하시기에 두 번 해 드리고 수련소도 두 번 갔다 왔더니 다른 달보다 더 많이 나왔네요. 그렇다고 제가 몇 만원 하는 KTX를 탄 것도 아니고, 한 달 동안 탄 기차는 모두 6-7천 원대였습니다. 그나마 많이 썼다면, 마중 나올 사람 없는 이른 시간에 도착하면 학교까지 가는 택시비 6천 원 정도. 그런데 24만 원이라니…. 학교에 머물렀던 3일 빼면 하루에 만 원씩 교통비로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통비가 아깝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래도 교통비 때문에 적자 나지는 않으니까요. 저에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이른바 ‘길에서 버리는 시간’ 말입니다. 수련소에 수업을 하러 간다고 하면, 마포에서 동서울까지 한 시간, 동서울에서 원주까지 한 시간 반, 원주에서 횡성까지 30분, 횡성 읍내에서 수련소… 왕복 합치면 7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한번 가면 많이 해야 한다고 수업을 네 시간 정도 합니다. 그래도 수업하는 시간보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신학교의 경우 그보다는 덜 걸려서 편도 2시간, 1주일에 왕복 4시간, 수업은 6시간 합니다. 

 

하여튼 길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 아깝습니다. 저는 시간이 한 시간 있다면 그 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계산이 딱 떨어집니다. 그래서 시간을 버리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씁니다. 성무일도를 들고 다니며 기차나 버스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약과이고, 교정지나 시험지를 들고 다닌다거나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기차 안에서 글을 쓴다거나 하는 등 그 시간을 잃지 않으려고 무지하게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입이나 손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발이 아름답다고 말이죠. 발도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겠지요. 다른 누구보다 바오로 사도는 발의 수고를 잘 알았을 겁니다. 이방인의 사도라고, 이전의 누구보다 많이 돌아다녔고 육로와 해로로 험한 길도 많이 다녔으니 말입니다. 세 차례의 전교 여행과 마지막에는 수인으로 로마에 잡혀가는 여행까지, 그는 삶의 많은 부분을 길에서 보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으니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시간에 비해 돌아다니는 시간의 비율도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수고도 요즘의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겠죠. 바오로 사도는 길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요? 버리는 시간? 아까운 시간? 걸어 다니며 다른 교회에 보내는 서간이라도 쓰고 싶었을까요? 그 시간에 할 수 있을 다른 일들을 생각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런 수고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 발의 수고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말씀이 귀에 들어왔던 날 회개를 좀 했습니다. 저의 사고방식은 너무 계산적이었습니다. 수업을 한 4시간은 일을 한 것이고, 길에서 보낸 7시간은 일을 하지 않은 것이고? 하기야 직장에서 임금 계산을 하면 4시간만 일한 것으로 계산하겠죠. 그것이 이 세상의 계산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걸어간 그 발의 수고를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과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일의 효과와 성과를 생각하는 것, 지극히 세속적입니다. ‘세속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가장 세속적인 단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돈? 권력? 쾌락?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살아가는 영역 안에서 가장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단어는 ‘업적’입니다.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가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게 쌓아 올려야 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업적을 계산해야 할까요? 각자 사람별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해야 할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성경의 인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유배 전의 많은 예언자들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지 그 성과는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예언서들이나 사도행전이 인물들의 업적을 기리는 책이 아니라는 점도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지만 예루살렘 멸망 이후 그가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는 그를 통해 선포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지, 그의 전기로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죽음에 대한 내용은 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로마까지 도달했다는 것이지 바오로 사도가 무슨 업적을 쌓고 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기록에 남겨야 할 업적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옛 선교사들이 생각났습니다. 16-17세기 유럽의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지금과 반대 방향으로 지구를 돌아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아시아에 왔습니다. 수십 명이 떠나도 대서양을 건너는 중에 상당수가 죽었고, 도중에 여행을 포기해 아시아까지 오지 못하거나, 태평양을 건너던 중에 상당수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중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은 아시아에서 단 한 명에게도 복음을 전하지도 세례를 주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수련기 시절 도미니코 수도회의 역사에 대해 배울 때, 17세기에 도미니코회 선교사 한 명이 조선에 들어오려고 일본까지 왔다가 결국 들어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죽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희 수련장 수녀님은 그가 한국의 순교자이고 그 순교자의 씨앗 덕분으로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이들은 삶 전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계산법으로 보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선교지에 무사히 도착해 활동을 하고 복음을 전파한 이들의 삶보다 가치가 덜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발’의 수고가 어쩌면 더 값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발’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도 환영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직접 기쁜 소식을 전할 때에는 물론 수고스럽기도 하고 그들에게 무언가 주어야 하지만 그들에게서 받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기쁨, 보람, 용기… 힘이 들어가는 것 이상으로 힘을 받게 되죠. 그러나 발이 하는 수고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더 온전한 의미에서 기쁜 소식의 선포를 위해 봉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업적을 계산하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에서도 말하는 ‘영적 세속성’이 바로 그 문제이죠. 훌륭한 업적을 많이 세우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차라리 정치나 사업을 하지…’ 속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병원이나 학교가 영리 추구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업적을 추구하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렇게 된다면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는 유익한 일을 하겠지만 그 자신이 복음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사람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는 세속성의 냄새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만큼, 저 자신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감각을 하느님께서 일깨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땅끝까지 제85호, 2015년 1+2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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