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화와 영성 (1) 가난한 이들의 메시아
우리는 〈성경, 문화와 영성〉의 제목으로 새 연재를 시작하려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즉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와 메시지는 다양한 문화의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특히 예술에서 표현되었다. 이것은 성경이 문화에 영향을 주고, 문화는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성경 읽기와 문화 읽기를 통해서 성경의 영성을 찾으려 한다.
■ 교황 프란치스코와 카라바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8월 19일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위대한 화가 가운데, 저는 카라바조를 칭송합니다. 그의 회화는 제게 말을 걸지요. 그러나 샤갈의 〈하얀 십자가〉도 좋습니다. 음악가 중에서는 물론 모차르트를 사랑합니다. 장엄미사곡 C단조 중 하나인 〈성령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는 비할 데가 없지요. 베토벤도 자주 듣고 바흐의 수난곡도 자주 들어요.”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칭송하신 화가 카라바조는 누구인가?
■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년)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그는 빛과 어둠의 명암법을 사용한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이다. 특히 카라바조는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가 그린 성경 이야기의 특징은 인물들을 무조건 고귀하고 이상적으로 표현하려는 당시의 경향과는 달리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 카라바조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간 삶의 모습 안에서 거룩함을 표현하려 했다. 즉 속(俗)에서 성(聖)을 찾으려 하였다.
우리가 먼저 함께 감상할 카라바조의 작품은 〈목자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Shepherds)〉이다. 이 작품은 화가가 죽기 바로 이전 해인 1609년에 그린 유채로서 314×211cm이며 현재 이탈리아의 메시나(Messina)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는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에서 다음의 특징들을 발견한다.
카라바조는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을 우주적이고 신기한 일로 묘사하지 않고 평범한 이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일상 안에서 발생한 구원의 사건을 묘사한다.
그림의 배경은 좁고 누추한 마구간이다. 카라바조는 구름을 탄 천사를 그리기 보다는 마구간의 소와 당나귀를 그려 넣었다. 나무판자로 된 마구간의 뒷벽은 낡아 있고, 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올 것만 같다.
마리아는 평범한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다. 그녀는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오는 먼 여행과 해산의 고통으로 매우 지쳐 있다. 힘든 표정의 마리아는 구유에 비스듬히 기대어 포대기에 싼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다. 어머니는 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아기의 등을 어루만진다. 예수님의 모습도 사실적이고 평범하다. 아기는 지쳐 있는 어머니의 뺨에 얼굴을 대고 있다. 마치 아기는 배고파 칭얼거리는 듯하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녹슨 농기구와 함께 요셉과 마리아가 먼 여행길에 들고 온 허름한 가방이 놓여 있다.
메시아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목자들의 모습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목자들은 머리가 벗겨지기도 하고, 어깨가 드러나기도 하며,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리고 목자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의 상태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목자들의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이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는 허름한 마구간에서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메시아
루카 2,1-20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예수님을 낳았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며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 요셉,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내고 메시아에게 경배하였다. 메시아 탄생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목자들, 그 복음을 듣고 메시아를 경배하러 간 목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님 시대의 고대 이스라엘은 엄격한 신분 사회이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사회 계층의 상층부에는 로마 제국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의 귀족들, 대사제,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 등과 같은 유다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인 수도 예루살렘에 살며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민의 대부분인 일반 민중은 시골 농부, 어부, 목자, 기술자, 소작인, 종, 품삯 일꾼 등이다. 다수의 가난한 민중은 겨우 생존을 유지하며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가난한 이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음식과 자원이 부족하여 고통당하는 이들이다. 이와 같이 사회 계층의 사다리에서 낮은 위치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바로 이 가난한 이들이었다.
메시아의 오심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복음이다. 복음은 총체적인 변화를 위한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기쁨의 이유가 된다.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가난과 억압, 착취의 상황이 그대로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 착취, 억압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변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된다. 그래서 복음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이다.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사회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배고픔, 억압, 가난에 고통당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방향지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이다. 사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삼으셨다.(루카 4,18)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메시아이시다. 가난의 영성은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다. 이 우선적 선택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2코린 8,9)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97항)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5년 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c/caravagg/11/67sheph.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