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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이스라엘 이야기: 갈릴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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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24 조회수3,167 추천수1

[이스라엘 이야기] 갈릴래아


예수의 유년기 청년기 모습이 서린 곳



갈릴래아 지방 이즈르엘 평야 전경. 멀리 타보르 산이 보인다.

 

 

우리나라가 지역마다 다양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비슷하다. 지금도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람들이 발음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 사투리 속에 출신 고향이 드러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도 방언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북쪽 사투리로 적힌 호세아서는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힘든 책에 속한다. 북쪽 사투리는 호세아서뿐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갈릴래아 사람들에게도 드러난다. 예수님이 대사제 카야파에게 체포되었을 때, 몰래 정황을 살피던 베드로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본 이유도 그의 사투리 때문이었다(루카 22,59: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참조). 우리가 말투에 배인 사투리를 벗기 어려운 것처럼, 고대 이스라엘도 방언으로 출신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광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만, 북쪽 갈릴래아 지방으로 올라가면 비옥한 이즈르엘 평야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찬양이 실감 난다. 이즈르엘의 ‘엘’은 ‘하느님’이고 ‘제라’는 ‘씨를 뿌리다’라는 의미다. 곧, 이즈르엘은 ‘하느님이 씨를 뿌리신 것처럼’ 많은 곡식이 나는 곡창 지대를 뜻한다. 밀, 보리, 옥수수, 아몬드, 올리브, 각종 야채들이 풍부하므로,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빵 바구니’다. 이 기름진 갈릴래아에 바로 예수님의 유년기가 담긴 ‘나자렛’이 있고(루카 4,16),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타보르’ 산이 있다(마태 17,1-9).

그러나 워낙 비옥한 탓에 예부터 이곳을 탐한 이방 세력들도 많았다. 가나안 장군 시스라가 쳐들어 왔을 때는 드보라가 타보르 산 전투에서 승리했으며(판관 4-5장), 카인족 여인 야엘이 시스라를 죽였다(판관 4,17). 기드온은 모래 언덕에 진을 친 미디안족을 꺾었다(판관 7,1).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등극한 사울은, 갈릴래아 지방 바로 아래쪽 길보아 산에서 필리스티아와 마지막 전투를 하다가 전사했다(1사무 31장). 이스라엘의 남서쪽 지중해안에 살던 필리스티아까지 갈릴래아 아래 지방으로 치고 올라왔으니, 갈릴래아에 이방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성경에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이사 8,23 마태 4,15). 그래서 유다인들은 부정한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고 믿었다(요한 7,52).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나타나엘도 처음에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요한 1,46). 곧, 주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초라한 마구간이었던 것처럼,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신 고향 또한 천시 받던 갈릴래아 지방이었던 것이다.

나자렛의 현재 모습. 예수님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2000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산수 공식처럼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묵상처럼. 이것은, 삼십여 년에 걸친 신앙 생활 속에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던 것 같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우연히 접하게 된 주보에서 마더 데레사에 대한 글을 읽은 후, 이론이 아닌 가슴으로 그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다. 캘커타에 비참하게 방치된 빈민들을 보고, 귀한 영혼들이 죽어갈 때마다 마음 아파했다던 마더 데레사. 어떻게든 그들을 구제하고 끌어올려 보려 했으나, 너무 망가져서 희망도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부호들의 기금이나 후원회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들 곁으로 내려가 직접 돕기 시작했다.

그래서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먹고 거리에서 죽는 빈민들이 마더 데레사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의 자녀로 죽게 해 주심에 감사해했다고 한다. 곧, 그 사람의 처지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함께 아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아마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 공생애의 의미를 뿌리까지 이해하셨던 것 같다. 인간을 하늘나라로 끌어올려 구제하기에는 희망도 의욕도 보이지 않으니, 몸소 가장 낮은 마구간으로 내려오시어 밑바닥 계층까지 끌어안으려 하신 것임을. 그리고 천한 갈릴래아 사람들에 섞여 생활하고 먹으며, 또 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임을.

 

* 김명숙씨는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25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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