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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히즈키야 임금 이야기(2열왕 18-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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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04 조회수4,131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126)


“히즈키야는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냈다. 느후스탄이라 부르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4).

 

 

기원전 933년 솔로몬 왕국의 북쪽 열 지파를 규합해 북왕국을 세운 예로보암은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궁리 끝에 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베텔에, 하나는 단에 두었다(1열왕 12장). 열왕기 저자는 여기에 모든 죄의 근원이 있다고 보면서, 북왕국의 모든 임금이 예로보암의 죄를 따랐으므로 북왕국의 모든 임금을 사악한 임금으로 단죄했다.

 

반면 남왕국의 임금 가운데 히즈키야와 요시야를 최고로 훌륭한 임금이라고 칭송하는데, 그 이유는 나라 안에서 우상숭배를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히즈키야 임금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때까지도 섬기던 모세가 만든 구리 뱀 느후스탄을 조각내어 정통 유일신 신앙을 확립했다. 열왕기 하권 18장 3-8절은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가 정통신앙을 세운 히즈키야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다.

 

과거에는 금송아지나 느후스탄 우상이 문제였지만, 오늘날에는 부와 명성이라는 우상이 가장 큰 문제다.

 

“오늘날에는 부가 가장 큰 우상입니다. 군중이, 인간 대중 전체가 부를 본능적으로 섬깁니다. 사람들은 재산으로 행복을 재고 또 재산으로 명예를 저울질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재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오늘날 하나의 우상이며 명성은 또 다른 우상입니다. 명성 곧 세상에 알려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선인 양, 그리고 참된 숭배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여론에 의한 명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존 헨리 뉴먼 추기경, ‘연설집 5’ (그리스도교 원리의 표준인 거룩함) 중에서.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돈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화를 붙들고 얘기할 시간은 있지만 믿음을 위한 시간은 없고, 텔레비전을 볼 시간은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답 가운데 첫째는 돈이었고, 둘째는 건강이었다. 사람들의 가치순위가 이러니, 건강을 해쳐가며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건강을 위해 써버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같은 질문을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해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 대답은 과연 어땠을까? 하느님이 첫째 자리를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첫째는 역시 돈이었고, 둘째는 건강이었다. 이제 세상에서 돈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물신숭배의 시대인지라 천주교 신자 역시 하느님이 아니라 물신(物神)을 섬긴다.

 

오늘날은 돈이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 안에서조차 돈이 하느님이다. 재벌의 행태를 닮아 점점 커지고 확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대형교회, 돈 때문에 목사와 신도들이 서로 때리고 싸우고 법정소송까지 가는 대형교회를 보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신자들 역시 돈을 하느님으로 떠받든다. 인간과 돈의 관계는 배와 물의 관계와 같다. 물이 없으면 배는 무용지물이지만, 물이 배 안에 들어와 배를 차지하면 배는 침몰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인간을 지배하면 인간은 파선한 배와 같이 된다.

 

묵상주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2015년 2월 1일 연중 제4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27)


“히즈키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서도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5)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열왕기 하권 18장에서 히즈키야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그 이유는 히즈키야가 나라 안에서 우상숭배를 몰아내고 정통신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열왕기 하권 18장을 읽으며,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우상을 섬기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4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 단테(1265-1321)는 피렌체 대학,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 수사학을 공부하고 상류사회에 출입하며 피렌체 시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1295년 품위 있는 귀족여인과 결혼해 네 자녀를 두었다.

 

어느 날 단테는 아내와 함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해 흥겹게 춤을 추었다. 그런데 별안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지며 집이 내려앉았다. 그의 아내는 무너진 가구들에 깔려 죽고 말았다. 단테가 죽은 아내의 화려한 옷을 벗기자 고복(苦服)이 드러났다. 고복은 중세 때 염소 털로 만든 내의를 피부에 밀착시켜 입은 옷으로 속죄와 보속의 방법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단테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깨닫고 저작활동에 전념해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노래한 불멸의 작품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단테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대서사시인 호머(Homer)와 기원전 1세기 로마시대의 위대한 시인 베르질리우스(P. Vergilius. 기원전 70-19)의 전통을 이어받는 시성(詩聖)으로 평가된다. 단테는 중세와 근대의 갈림길에 선 유럽이 새로운 기운을 찾아 몸부림칠 당시, 인간 내면세계와 하느님의 섭리를 대비시킴으로써 가톨릭 문학의 지평을 확립했다.

 

<신곡> ‘연옥편’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혼을 향해 말하는 구절이다.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사랑에 서열을 정하기를 바라노라.”

 

루카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러고 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비유의 결론은 이렇게 난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고대의 임금이나 군주들은 신의 이름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오늘날 신에 의한 통치를 인간에 의한 통치로 바꾸어 놓은 것은 ‘경제’다. 경제는 신의 자리에 올라섰으니 그 신의 이름은 물신(物神)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물신을 추구하며 산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돈이다. 정부는 경제성장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으로 보고, 단기간에 효과가 있을 법한 토목사업과 일자리 만들기에 열중한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돈이다. 국민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국민들도 아파트 평수 늘리기와 자식 등수를 높이려고 모든 걸 건다. 돈만 있으면 만사형통으로 착각한다. 돈과 나의 욕심이 삶의 기준이므로 인권, 복지, 공동체, 환경 같은 공동선은 뒤로 밀려났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치가나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돈에 빠져있는 우리 마음을 깨줄 수 있는 사상가다.

 

묵상주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보자.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사랑에 서열을 정하라.” [2015년 2월 8일 연중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28)


“히즈키야 임금 제14년,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요새 성읍으로 올라와서 그곳들을 점령했다.”(2열왕 18,13)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기원전 704-681년)은 기원전 701년 히즈키야 임금 재임 제14년에 유다를 침략했는데, 그 때 예언자 이사야가 활동했다. 열왕기 하권 18-19장은 그 당시 상황에 관한 내용이다.

 

열왕기 하권 18장 13절-20장 19절은 이사야 사료다. 이사야 사료는 열왕기 안에 있는 이사야 예언자에 관한 독립된 이야기 모음이다. 그런데 이 사료의 내용은 열왕기 하권 18장 14-16절을 제외하고 이사야서 36-39장의 내용과 같다. 열왕기의 이사야 사료와 이사야서 36-39장 가운데 어느 것이 시기적으로 더 먼저일까? 학자들은 열왕기의 이사야 사료가 이사야서에 이식되었다고 본다.

 

아하즈 임금이 죽고 그 아들 히즈키야(기원전 716-687년)가 임금이 되자 이사야는 다시 대중 앞에 나서서 예언활동을 시작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이사야는 유다가 이집트나 다른 이웃 나라들과 정치적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했고, 군사력으로 구원을 찾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다. 히즈키야 임금이 이집트의 사주를 받은 필리스티아 도시 아스돗과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반기를 드는 모사에 동참하려 하자 이사야는 극구 반대했다. 그것은 이사야가 친 아시리아파였거나 아시리아의 첩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사야는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는 하느님 분노의 지팡이를 아시리아 군대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사를 주도했던 아스돗은 기원전 711년 아시리아의 임금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년)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그 도시의 주민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갔다. 다행히 히즈키야는 이사야의 권고를 따라 이 모사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이런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기원전 705년 사르곤 2세가 죽자 아시리아 제국은 내분에 빠져들었다. 주변 군소 국가들은 아시리아의 멍에에서 해방될 기회로 여겼고, 근동에는 바야흐로 해방의 물결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어 이번에는 히즈키야가 주도권을 쥐고 아시리아에 반기를 드는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모사는 늘 그랬듯이 이집트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해방투쟁은 성공하지 못했고, 유다는 톡톡히 그 값을 치러야 했다. 산헤립이 아시리아의 내분을 평정하고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산헤립은 기원전 701년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유다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히즈키야는 엄청난 조공을 바치고 간신히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2열왕 18,13-16 참조). 그래서 이사야는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손에 있는 도구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히즈키야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판했다.

 

이사야는 민족적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확신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했다. 유다가 구원받는 길은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역설했다. 군대의 힘이나 외교적인 수단에 희망을 걸지 말고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선포의 핵심은 주님을 믿는 확고한 신앙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활동하실 자리를 남겨두는 신앙을 요구했다.

 

묵상주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며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발견한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느님,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이 작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근동의 강대국들 틈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이 작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 만민으로 하여금 유일하신 하느님을 알도록 이끄는 것이다. 약소국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무한하심, 이스라엘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영광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존재의 특수성과 사명의 보편성 때문에 역시 역설이다. [2015년 2월 15일 연중 제6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29)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온 것을 기억해주십시오”(2열왕 20,3).

 

 

히즈키야는 열왕기 저자가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임금이다. 히즈키야는 부왕 아하즈가 끌어들인 메소포타미아의 성신숭배(星辰崇拜)를 나라 안에서 몰아내고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냈기 때문에 요시야 임금과 더불어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받았다.

 

열왕기 하권 10장 1-11절은 히즈키야가 하느님께 간절히 올린 기도를 하느님께서 가납(嘉納)하시는 이야기다. 히즈키야는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눈물로 기도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2열왕 20,3).

 

이 대목을 읽을 적이면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나도 훗날 히즈키야처럼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무더운 여름에 매미는 참 고마운 존재다. 시원한 바람에 실려 오는 매미 울음소리는 더위를 식혀주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매미는 고마운 존재일뿐더러 경탄할만한 존재다. 남들 열심히 일할 때 노래나 부르는 매미를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매미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는지 안다면 감탄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매미는 땅 속에서 5-6년 동안 살면서 네 번이나 허물을 벗는 아픔을 겪는다. 그런 다음 딱딱한 흙을 뚫고 땅위로 올라온다.

 

매미가 땅위로 올라오는 과정도 눈물겹다. 흙이 아무리 딱딱하더라도 매미의 애벌레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올라온다. 어떤 애벌레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왔다는 기록도 있다. 땅위로 올라오면 나무에서 6년 정도 지내면서 마지막 허물을 벗고 멋진 날개를 달고 노래를 부른다. 매미가 그 시원한 울음을 울기까지 적어도 11-12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렇게 힘겹고 눈물겨운 긴 시간을 거쳐 매미가 된 다음에 얼마나 살까?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 매미는 그 한 달이 너무 소중하고 고마워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울어댄다. 매미에게는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오직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다.

 

악성(樂聖)으로 추앙 받고서 마침내 눈을 감으려는 매미에게 젊은 귀뚜라미가 부탁했다.

 

“한 말씀만 남겨주십시오.”

 

매미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유언을 남겼다.

 

악성 매미가 남긴 말은 이렇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내일을 바라면서 오늘을 헤프게 사는 자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오늘이란 우리가 과거에 기다렸던 그 미래가 아닌가? 내일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오늘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노래했다. 오늘 하지 않으면 다시는 못할 것처럼.

 

우리는 삶을 여행으로 알아야지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행복은 그곳에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만일 우리가 날마다 오늘을 알차게 산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오늘 나타난다.

 

오로지 오늘에 매달려라. 오늘 치를 일을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묵상주제

 

매미가 땅위로 올라오려고 있는 힘을 다하듯이 우리도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다. 매미처럼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충실히 사는 매미를 본받자. 할 일이 있으면 오늘 하고, 기도해야 한다면 오늘 기도하고, 봉사해야 한다면 오늘 봉사하고, 회개해야 한다면 오늘 회개해야 한다. [2015년 2월 22일 사순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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