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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성경의 기도: 겟세마니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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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18 조회수3,967 추천수1

[신약성경의 기도] ‘겟세마니’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



겟세마니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마르 14,32-42를 중심으로)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과 (‘주님의 기도’를 포함하여)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많이 나와 있지만, 정작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내용이 직접 나오는 곳은 드물다.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시편 기도(마르 15,34)를 제외하고는, 마르 14,35ㄴ-36은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이 몸소 하신 기도의 내용을 직접 전해주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기도할 때 예수님의 상태 :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14,33-34).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셨다.”라는 표현이 매우 놀랍게 여겨진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님을 어떤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심리적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영웅으로 절대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느 인간들처럼 처절하게 두려워하고 고통을 겪으신 것으로 묘사한다.

기도의 자세 :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라고 기도하시며”(마르 14,35).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자세는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의 자세이다(창세 17,3의 아브라함의 경우 참조).

이 기도의 자세를 우리는 오늘날에도, 교회 전례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예컨대, 성금요일 주님수난예식 시작 때, 주교와 사제의 서품식과 수도자들의 종신서원식 때, 수품자(봉헌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예식이 있다.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식이다. 하느님 뜻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고 서약하는 행위이다.

기도의 내용 :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기도의 내용이 35ㄴ절에는 간접인용문으로, 36절에는 직접인용문으로 되어 있다. 36절을 중심으로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아빠[압바],아버지!’라는 호칭, 아빠(압바)라는 호칭이 지니는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아빠(압바)라는 호칭은 아람어인데, 자녀들이(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장성한 자녀들을 포함하여) 아버지를 향하여 애정을 담고 건네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아빠(압바)’라는 단어가 이방인 독자들에게는 생소하였을 텐데도, 일부러 원어로 전해주면서 뜻풀이를 하였다. 이는 그만큼 그와 그가 속해있던 초창기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에, 예수님께서 이런 호칭을 몸소 사용하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호칭에는 예수님만이 하느님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고유한 관계가 드러나 있다. 압바(아빠)라는 아람어는 신약성경 전체에 단 세 번 언급되는데, 복음서들에서는 여기 마르 14,36이 유일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로마 8,15와 갈라 4,6에 나온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들에 따르면,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와 결합하였고, 하느님을 ‘아빠(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놀라운 은총이었다.

하느님의 초월성이 매우 강조되고 있던 시절에 감히 하느님을 이렇게 부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느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빠(압바)’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 되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 각자의 인생과는 상관없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밀하게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셨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②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하느님 아버지의 전능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폭력적 죽음을 바로 앞둔 상태에서, 비록 ‘공포와 번민’에 사로잡히기는 하시지만, 여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하여 절대 의심하지 않으신다.

③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임박한 수난과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적 원의를 감추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드러내 보이신다.

④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원의를 드러내기는 하셨으나, 즉시 하느님 아버지의 원의를 받아들이며 그분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신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조건 없이 순종하시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기도의 본질적인 면이 잘 드러난다.

기도의 목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현존 속에 들어가는 것’(그분과의 만남)이며,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것 여부마저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만남(대화)을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뜻에 일치하려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고, 청원만 늘어놓는 것은 참다운 의미의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겟세마니 기도에 나타난 기도의 정신이 이미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다음 청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골고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마르 15,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마르 15,34).

어떤 사람들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마르 15,34의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 상태의 표현이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답부터 말하자면, 이 말씀은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편 22편의 시작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기도다.

이 시편은 독특한 문학유형을 지니고 있다. 전반부는 극심한 곤경 중에 절규하는 탄원시지만, 후반부(22ㄴ절부터)는 찬양시다(특히 22ㄴ-24절 참조). 임승필 신부는 마르 15,34에 실려있는 시편 22,2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의 그 고통을 우리가 약화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 객관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듯이 보이는 죽음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서도, 예수님께는 하느님이 변함이 없는 ‘나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신뢰다. 예수님은 바로 이 신뢰 위에 계신다. 이 신뢰로 절망이 절망이 아니고, 하느님의 멀리 계심이 멀리 계심이 아니며, 하느님의 저버리심이 저버리심이 아니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고통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시편 22의 기도자가 경험하지 못했던 죽음의 심연에까지 이르러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임승필,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성바오로출판사, 1992, 118쪽).


묵상 :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와 골고타 기도를 정리하며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고뇌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겟세마니 장면’과 예수님께서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통 중에 외치시는 장면(히브 5,7-8도 참조)은, 이런 대목을 읽는 우리 신앙인 독자들에게 우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고뇌하시며 고난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성경 말씀은 신앙인 독자들에게, 혹시라도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 같은 일을 겪으며 극심한 고뇌에 휩싸이게 될 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그토록 깊은 고뇌를 하시며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시며 “그분의 뜻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태도를 본받으라고 초대한다.

다른 한편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스승 예수님을 잊은 채, 잠들어있던 제자들의 모습도 우리에게 많은 묵상을 하게 한다. 오늘의 어려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면서 극심한 고뇌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우리의 삶이 그분들의 노력과 고뇌를 전혀 모른 체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도 복음에 나오는 저 ‘잠들어 있는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또한 고통 중에 번민하시고, 괴로워 외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는 성경의 대목들은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성경 말씀에서 우리는 신앙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본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앙 안에서의 강한 모습’이란 비록 두려움을 느끼고 고뇌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온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께서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당신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간구하는 이들을 변화시키시며 힘을 주신다는 점이다.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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