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묵시록의 상징체계 (1)
묵시록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묵시문학적 특징인 상징체계 때문이다. 묵시록의 내용 자체가 수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진 것은 묵시문학으로서 성숙되고 심화된 하느님의 계시에 역사의 유동적 영역을 접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묵시록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확고한 기반은 묵시록의 문학적 배경이 천문학이나 점성술 또는 고대 근동 민족들의 신화가 아니라 구약성경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상징에 따라 다른 배경이 어느 정도 문화적 · 관습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묵시록의 저자는 항구하게 구약성경의 상징적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 저자가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를 구약성경 안에서 찾아가는 과정 중에는 묵시록의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파격, 곧 저자가 구약 본래의 상징을 의도적으로 비틀거나 변형시키고 있는 부분에 대한 감수성도 요구된다.
저자는 구약성경의 상징을 바탕으로 창조적 독창성을 발휘하여 나름대로의 상징체계를 구현하기 때문인데, 이런 상징적 언어를 이해하려는 독자에게도 창조성이 요구된다.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저자의 이런 창조성을 이해한다고해서 자의적인 해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창조성은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상징적 담화 안에서 항구한 특징들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항구적인 요소들을 뽑아내고 해석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우주의 상징
우주의 영역을 표현하는 용어들 - 하늘, 별, 태양, 바다 등등 - 은 구약 안에서도 그렇지만 묵시록 안에서도 현실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징화의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하늘’은 실제적 의미에서 창공을 의미하기도 하고, 상징적으로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초월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별’ 역시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늘에 있는 별을 지칭하기도 하고, 상징적으로는 ‘창조사업과 관련된 하느님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우주적 혼란을 이야기할 때, 별은 현실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교회의 천사(1,20), 하늘에서 떨어진 악마적 존재(9,1)를 지칭하거나 그리스도께 적용된 빛나는 샛별(22,16)의 경우에는 상징이다. 이 상징으로서의 공통점은 하늘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가 땅에 떨어지는 것, 곧 땅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첫째, 교회의 역사적 구체성에 대조되는 천상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을 지칭한다. 둘째,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전달하시는 종말론적 완성의 날을 향한 긴장을 의미한다. 셋째, 그 자체로는 초월적인 존재가 강제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땅에서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천둥, 번개’는 구약에서 이미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초기적 상징화는 묵시록 안에서 새로운 발전 과정을 겪는다. 하느님의 어좌에서 나오는 ‘번개와 천둥’은 확실하게 ‘목소리’(4,5; 8,5; 11,19; 16,18)이다. 동일한 선상에서 상징적으로 초월성의 목소리로 변화된 천둥에게 인간적 언어구조가 적용된다. 10,3에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칠 때, “일곱 천둥도 저마다 소리를 내며 말하였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던 것이 신비적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정연한 말이 된다.
시야를 넓혀 다른 우주의 요소들(예를 들어 태양, 바다, 구름 등)의 발전과정을 연구해 보아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곧 상징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주 안에는 새로운 것의 태동이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든 하느님의 초월성과 관련됨으로써 실제의 현실적인 수준을 뛰어넘게 하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혼란
일반적인 순환의 변화는 특히 분명하고 근본적인 의미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고정화된 상징화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두워진”(9,2) 해(태양)가 “털로 짠 자루옷처럼 검게 되고”(6,12), 부분적으로(해의 3분의 1: 8,12) 또는 전체적으로(16,8 참조) 타격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결국, 종말론적 차원에서 새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1,23). 달은 “온통 피처럼 되고”(6,12), 부분적으로 타격을 받으며(3분의 1: 8,12), 여인에 의해 지배당하고(12,1), 해 못지않게 새 예루살렘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21,23).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사라져버리고”(6,14), 새 하늘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하여 사라져야 한다(21,11 참조).
별들은 하늘에 속하며(6,13) 그들 본연의 장소는 하늘이다. 그러나 그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그들 중 일부분은 용에 의해 하늘에서 떼어내져 땅으로 던져지며(12,4 참조), 그들 역시 부분적으로 타격을 받고(8,12 참조)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진다(6,13; 8,10). 땅 역시 폭력적 변화의 구조 안에서 재고되고 있다. 해침을 당할 수 있고(7,2.3), 불타고(8,7), 부분적이지만 온갖 재앙으로 해침을 당하고(11,6), 사라져야 하며 새로 나야 한다(21,1).
이런 지상적 실재의 폭력적인 변화는 묵시록의 영역에서 여러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나무들과 풀이 불타고(8,7), 산과 섬들이 제자리에 남아있지 않고(6,14), 어느 순간에 이르러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16,20). 그리고 더 일반적인 용어로 물이 쓰게 변하고(8,11), 피로 변하기도 한다(8,8). 다른 구성 요소와 양상들의 폭력적이고 불가능한 결합으로 인한 변화들도 있다. “불타는 큰 산”(8,8), “불이 섞인 유리바다”(15,2) 등이다.
우리는 묵시록에서 이런 혼란의 상징들을 접하면서 흔히 이를 현실적인 담화와 혼동하고, 세상의 종말은 이런 폭력적인 현상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인간들이 이런 우주적인 변화에 접하여 “이러한 재앙들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주장할 때(16,9; 16,21ㄴ도 참조), 우리는 해석적 평가의 확실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문맥 안에서도 하느님은 자연의 절대적인 주인이시라는 신념이 예리하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일반적인 순환의 변화들은 하느님의 특별하고 촉진적이며 선동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현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의 혼란을 묘사하면서 두드러지게 많이 쓰이고 있는 동사의 수동태형들은 신학적 수동태이며, 하느님께서 이 모든 혼란의 주체이시다.
인간 역사의 변화
묵시록의 우주적 혼란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인간과 연관되어 그에 대한 반응을 유도한다.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하느님의 활동적 현존은 이렇게 역사의 구체적 영역에 위치한다.
나팔부분(8,7-12)에서와 같이 부분적이고 한정적인 변화가 있는 것(3분의 1)은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능동적이고 변화시키는 현존이 그 효과 면에서 아직 부분적이고 한정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불타는 큰 산(8,8)이나 불이 섞인 유리바다(15,2)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부분적 변화, 그리고 공존하는 물과 불의 새로운 관계는 새 창조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다음에 묵시록 16,1-16처럼 나팔에 의한 변화보다 더 큰 우주적 변화가 나올 때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변화시키는 행동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중대한 날”(16,14)이 도래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변화의 극한점에 도달했을 때 - 검게 변한 해, 피로 변한 달, 땅에 떨어진 별들(6,12-17과 16,1-21) -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현존이 극한점에 도달한다. “중대한 날”에 도달한 것이다(6,17).
우주의 변화는 인간 역사와 그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하느님의 능동적인 현존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의 핵심으로 이끌어간다.
세상은 변해야 하고 변할 것이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영향으로 이미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성근 사바 신부 - 1991년 사제로 수품, 교황청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이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이성근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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