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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이스라엘 이야기: 타보르 산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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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02 조회수2,892 추천수1

[이스라엘 이야기] 타보르 산의 변모


십자가 죽음 앞서 미리 보여준 하늘나라 권능



타보르 산과 주변 이즈르엘 평야 전경.

 

 

갈릴래아 지방 이즈르엘 평야에는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 인상적인 ‘타보르 산’이 있다. 주위가 다 보여서 ‘다볼 산’이라 할 만큼 전망이 좋다. 정상에 서면 세상을 모두 가진 것 같은 풍부함을 선사한다. 해발 588미터에 달하는 타보르 산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구약 시대에는 드보라가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꺾었고(판관 4-5장),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사실 신약은, 예수님이 어느 산에 오르셨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저 ‘높은 산’이라고만 기록했을 뿐이다(마태 17,1 마르 9,2). 그러나 서기 4세기에 헬레나가 성전을 봉헌하고 7세기에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위한 성당이 지어진 것으로 보아, 그전부터 타보르라는 전승이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 헤르몬 산을 지목하는 의견도 있다. 변모(마태 17,1-9) 바로 전에 예수님이 카이사리아 필리피에 계셨기 때문이다(마태 16,13-20).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현재 골란 고원의 북서쪽 지방으로서, 헤르몬 산과 무척 가깝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고, 베드로에게 수위(首位)권과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다(마태 16,17-19). 그리고 그로부터 ‘엿새 뒤’ 변모가 있었다(마태 17,1 마르 9,2). 그러나 타보르와 헤르몬 가운데 어디가 더 정확하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두 산 모두 주님의 위업을 드러내는 봉우리로서, 시편 89,13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권위가 타보르와 헤르몬을 통해 나타난다고 찬양한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어 신성하신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심은, 주님 부활과 재림에 대한 전조가 된다(2베드 1,16-18 참조). 곧, 하늘 나라의 권능이(마태 16,28 마르 9,1 등) 주님 변모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 타보르 산 정상의 '변모 성전'.

 

 

주님의 변모는 또한 탈출기를 재현하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머무셨을 때 구름이 엿새 동안 그곳을 덮은 것처럼(탈출 24,16), 엿새 뒤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을 때 빛나는 구름이 그 위를 덮었다(마르 9,7). 하느님이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탈출 24,16), 예수님의 변모 때도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마르 9,7).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서 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처럼(탈출 34,30),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빛나고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마르 9,3.6). 게다가 높은 산은 시나이 산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모세와 엘리야도 시나이(호렙) 산에 올랐었다(탈출 24,16 1열왕 19,11).

특히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서의 상징으로서, 예수님의 구원까지 한 라인을 이어간다. 그리고 모세의 등장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일으킬 모세 같은 예언자’(신명 18,15)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뜻하며(사도 3,28), 엘리야는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시리라’는 말(3,23)과 관련이 있다. 이 경이로운 모습에 압도된 베드로는 엉겁결에 초막을 짓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초막은 임금이신 하느님을 기념하는 ‘초막절’(즈카 14,16)을 떠올린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그런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 압도를 넘어 신성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두려워했던 것처럼(신명 5,24-26). 예수님의 변모를 목격함은, 한낱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을 뵙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 전에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까닭은 아마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수난 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곧 약한 인간에게 미리 보여주신 하나의 끈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고, 사실 그 기억 때문에 평생 동안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에게는 주님의 변모가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다. 비록 십자가형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으나(루카 22,54-62), 그가 다시 일어나 주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계기는 예수님 신성에 대한 확신 덕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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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씨는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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