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요시야 임금 이야기(2열왕 22-23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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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03-02 | 조회수3,016 | 추천수1 | |
역사서 해설과 묵상 (130) “요시야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2열왕 22,2).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북왕국의 임금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단죄했다. 임금의 정치적, 경제적 치적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런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오므리 왕조와 예로보암 2세다. 오므리(기원전 886-875년)에서 시작된 오므리 왕조는 아합(875-853년), 아하즈야(853-852년)를 거쳐 요람(852-841년)까지 45년 동안 계속되었다. 841년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키기까지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을 국제적으로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오므리 왕조를 아주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41년이라는 최장기간 동안 통치한 예로보암 2세(787-747년)도 마찬가지다.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기원전 8세기 중엽 예로보암 2세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이스라엘이 국가적 부흥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국제정세 덕분이었다.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예로보암 2세는 대상무역(隊商貿易) 통로를 지배하고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솔로몬 왕국의 북쪽 경계선을 회복하고, 예후가 잃어버린 요르단 동쪽 지역도 되찾았다(2열왕 14,25 참조). 이렇게 대단한 치적을 자랑하는 예로보암 2세조차도 열왕기 저자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한다.
남왕국의 임금들은 약간 다르게 평가한다.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므나쎄를 다윗 계열의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사악하고 못된 왕이라고 혹평한다. 그 이유는 부왕 히즈키야가 몰아낸 이방종교를 다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 므나쎄의 통치기간 동안 아시리아 제국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므나쎄는 유다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정책은 아시리아의 충실한 속국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를 유지하고 평화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정통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별 숭배와 점성술을 도입했다. 바로 이 때문에 열왕기 저자는 므나쎄 임금에게 혹평을 퍼부었다.
반면, 열왕기 저자는 히즈키야와 요시야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히즈키야를 두고 하는 평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 한 임금이 없었고, 그보다 앞서 있던 임금들 가운데서도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3-5). 이렇게 최고의 찬사를 바치는 이유는 히즈키야가 이방종교를 나라 안에서 몰아냈기 때문이다.
요시야에게도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2열왕 22,2).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이 이상의 찬사가 어디 있겠는가! 요시야가 최고의 칭찬을 받은 이유는 신명기법이 요구하는 대로 예배의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독특한 관점으로 남북왕국의 역사를 기록했다. ‘누가 훌륭한 임금이냐?’하는 나름대로 판단기준이 있었다. 하느님께 충성을 다한 임금, 이스라엘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임금은 훌륭한 임금이며, 이방종교를 묵인하거나 이방종교에 물이 들어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임금은 고약하고 무능한 임금이라고 혹평한다.
묵상주제
열왕기 저자의 판단기준을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는 관점이 있어야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법이다. 신명기의 사상에 근거해 나름대로 남북의 역대 임금들을 판단하며 거대한 역사를 써내려간 열왕기 저자의 노고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열왕기 저자의 판단기준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2015년 3월 1일 사순 제2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31)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열왕기 하권 22장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관한 내용이다. 요시야(기원전 640-609년)는 기원전 622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서에 따라 나라 안의 이방종교를 몰아내고 신앙의 순수성을 확립했기 때문에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들에게서 최고의 칭찬을 들었다. 열왕기 하권 23장 25절은 요시야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라고 볼 수 있다.
열왕기를 이끌어가는 기본노선은 각 임금에게 내린 판단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열왕기 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을 다음과 같이 모두 단죄했다. ‘그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일을 저질렀다.’ 북왕국의 모든 임금은 예로보암의 죄에 연관돼 있다고 비난한다. 다시 말해 베텔과 단 성소에 세운 금송아지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긴 예식에 연루되어 있다는 비난이다. 7일 천하밖에 되지 않았던 지므리의 치세(1열왕 16,19), 열렬한 야훼신앙 추종자였던 예후(2열왕 10,29-31)를 두고도 역시 같은 판단이 내려졌다.
예루살렘의 임금들에게는 세 가지 판단을 내린다.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일을 저지른’ 임금이라는 비난, 유보적 칭찬, 그리고 최고의 찬사로 나누어진다. 오직 히즈키야와 요시야만이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다른 모든 성소에서 행하던 예식들을 척결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학파 역사가의 이런 판단기준은 신명기의 규정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신명기 법의 기본적 규정은 한 분이신 하느님과 유일한 성전이라는 규정이다. 다시 말해 주위에 있는 모든 형태의 이교를 배척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예식을 유일한 성소로 집중시키는 것이다.”(R. de Vaux, ‘열왕기’).
열왕기 안에 여러 번 인용된 ‘모세의 법’(1열왕 2,3 참조)은 분명히 신명기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요시야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하여 개혁을 통해 적용시킨 율법서(2열왕 22,8 참조)도 오늘날 우리가 가진 신명기의 원형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열왕기 하권 22-23장에 요시야 개혁이 아주 상세히 묘사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모든 예배를 집중하는 것은 요시야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솔로몬 시대 초기에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이런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 있었다(1열왕 3,2-3 참조). 기원전 622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신명기 법전을 읽고 요시야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2열왕 22,13). 이것은 요시야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열왕기 저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요시야는 이스라엘 종교를 이방민족들의 종교와 혼합시키려던 당시의 풍조를 배격했다. 그는 아시리아의 일월성신 숭배를 위한 기물을 제거하려는 공사를 하던 중에 모세의 법전을 발견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이방종교에 물든 이스라엘의 신앙을 정화시켜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들었다.
묵상주제
하느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오롯이 섬기는 것,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요시야 임금에게서 배울 교훈이다. [2015년 3월 8일 사순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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