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바빌론 유배와 유다의 멸망(2열왕 24-25장)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용어] '십계명들'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개신교회 측이 따르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교 ...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03-17 | 조회수3,931 | 추천수2 | |
역사서 해설과 묵상 (132) “여호야킴 시대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 올라와서, 여호야킴은 세 해 동안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뒤에 그는 돌아서서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반역하였다”(2열왕 24,1).
바빌론 문헌에 따르면, 아카드 임금은 하티(Hatti) 지역에 군대를 보내 유다의 성을 포위하고 아달월 제2일에 성을 함락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기원전 598년 3월 16일에 함락된 것이다.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다의 임금 여호야킨과 그 가족, 귀족, 지주, 군사 지도자, 백성의 장로, 기술공, 제사장, 예언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물론 성전과 왕궁의 보물도 약탈했다. 은장이, 대장장이 같은 기술공들을 사로잡아간 이유는 다시는 철을 두드려 칼과 창 같은 전쟁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잡혀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에제키엘이다. 잡혀간 사람의 숫자는 1만 명이었다(2열왕 24,14 참조). 여호야킨은 아버지 여호야킴이 바빌론에 반기를 든 행위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 대신 그의 삼촌 마탄야를 임금으로 삼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고쳤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나부코’는 열왕기 하권 24-25장에 나오는 바빌론 제국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을 뜻한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받던 때인 1842년 베르디는 애국심이 넘쳐흐르는 오페라 나부코를 완성하여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La Scala)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부코는 베르디가 거둔 최초의 성공작이었고 그 덕분에 베르디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알려졌고, 더 나아가 베르디를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자로 만들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노래를 부르는 히브리 사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했다. 그래서 베르디의 장례식 때는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닌데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모두 일어서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함께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애국적인 작품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베르디는 1847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소재로 한 오페라 ‘멕베드’를 쓰면서부터 애국심에 호소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순수 음악적 작품으로 전환했다. 그 뒤에 나온 작품이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로서 우리말로는 ‘춘희’라고 번역했는데, 1853년 초연되었다. 베르디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알렉산드르 뒤마의 연극을 보고 이것을 오페라로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애 마지막에 나온 불후의 명작으로는 오페라 ‘아이다’(Aida. 1871년 초연)를 꼽을 수 있다.
어느 시대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옥석이 가려진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라의 불행을 내 것으로 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애국자가 가려지기 마련이다. 예레미야,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는 한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한 애국자였다. 반면에 하난야 같은 거짓 예언자(예레 28장 참조)는 나라와 민족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 사람이었다. 치드키야 임금 때 유다 왕궁의 친 이집트파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묵상주제
나라와 교회가 어려울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생각해보자. [2015년 3월 15일 사순 제4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33) “치드키야가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였다”(2열왕 24,20).
열왕기 하권 24장 18-20절은 치드키야의 유다 통치를 간단히 언급한 다음, 25장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백성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는 유다의 마지막을 이야기한다. 유다의 마지막은 바빌론과 이집트 제국 사이에 끼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갈팡질팡의 시기’였다. 이 어두움의 시기를 밝힌 유일한 등불은 예레미야 예언자였다.
바빌론에 의해 임금으로 임명된 치드키야는 바빌론과 이집트 중간에서 갈피를 못 잡았다. 이집트와 주변 국가들은 치드키야에게 바빌론을 거역하는 음모에 가담하라고 요구했고, 대신들은 바빌론과 단교하고 친 이집트 정책을 펴라고 치드키야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예레미야는 기꺼이 바빌론의 멍에를 지라고 설파했다. 이스라엘을 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빌론 군대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다는 바빌론의 멍에를 부술 수 없었다. 바빌론 제국은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실현하려고 선택하신 도구였기 때문이다. 팔레스티나의 정세에 불안을 느낀 네부카드네자르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결국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 군대에게 함락되고, 도망가던 치드키야는 붙잡혀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한 다음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바빌론으로 끌어가고, 백성 가운데 천한 사람들만 남겨두어 농사를 짓게 했다. 이렇게 하여 400년 넘게 계속된 다윗 왕조는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부터 2천년 가까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온 세상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질 때는 유능한 지도자와 무능한 지도자가 분명히 가려진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1575-1641년)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지만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인물이다. 광해군은 명(明)과 청(淸)이 교체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해 자주적인 외교를 추진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민생의 안정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강성해지자 대포를 주조하고 국방을 강화했다.
한편 명나라가 후금 정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 강홍립과 김경서에게 군인 1만 명을 주어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명령했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한 뒤,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는 그런 식견이나 지도력이 없었다. 그 결과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나라는 청나라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치드키야가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현명하고 자주적인 외교를 펼쳤다면 나라가 멸망하는 국가적 재앙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치드키야가 친 이집트파 대신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예레미야의 말을 따랐다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냉혹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 때문이다.
묵상주제
나라가 멸망하는 시기에, 전쟁과 음모와 불의 같은 모든 악한 것을 빼고 남는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실하고 유능한 지도자와 얼치기 불한당이 분명히 가려진다는 것이다. 사실, 나라의 운명이 기울 때의 지도자에게는 평화로운 시대의 지도자와는 달리 변명의 여지나 빠져나갈 구멍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역사서 해설과 묵상’을 집필해 주신 이중섭 마태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2015년 3월 22일 사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