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야기] (47) 가상칠언 (상)
십자가 위 마지막 메시지는 자비와 희망
- 골고타 언덕의 ‘주님 무덤 성당’. 리길재 기자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형 죽음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맺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은 ‘인간의 구원’이다. 구원은 인간의 영과 마음, 육신 모두를 궁극의 원래 자리. 즉 원죄 이전의 하느님과 하나 된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맺는 새 계약인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네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최후를 맞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다. 이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속죄와 구원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웅변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형으로 이끈 이들의 용서를 하느님께 청하신다. 그리스도의 자비가 드러나는 말씀이다. 처형장에 있던 로마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로마인이던 유다인이던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께서 청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 대한 고백은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주랑에서 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사도 3,14-17).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선포한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그리스도의 용서는 교회의 삶으로 곧장 받아들여졌다. 스테파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청했던 이유로 무지를 내세우신 것은, 그리고 무지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보시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이에게 위로의 원천이 된다”고 설명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함께 처형되는 오른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낙원’을 뜻하는 성경 본문의 헬라어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ο)는 원래 ‘페르시아 왕의 정원’을 뜻하는 말로 아름드리나무로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선망의 동산이었다. 이 낙원을 구약의 창세기는 ‘에덴동산’(창세 2,10)으로, 바오로 사도는 ‘셋째 하늘’(2코린 12,2)로 표현하는데 이는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때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묵시 21,2)을 뜻한다.
강도가 예수님께 이끌려 그분과 함께 바로 천국 낙원에 들어간 것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주님은 조롱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든지 당신께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오른편 강도에 대해 “그는 예수님의 신비를 알아차렸기에 곧바로 아버지와의 친교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모두 예수님께 9시께 십자가 위에서 큰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고 한다. 두 복음서는 예수님의 절규를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인 그대로 전하고 다시 헬라말로 번역한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 외침은 여느 버림받은 자의 탄신이 아닌 구원을 청하는 참된 메시아의 외침이다. 예수님의 수난사 전체를 관통하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도 나오는 메시아 수난에 관한 모든 예언을 완성하는 주님의 기도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 주해를 통해 이 부르짖음을 ‘새로운 기도’라며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며 동시에 몸으로서 기도하신다”고 풀이했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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